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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베트남 정보

베트남 역사 - 프랑스 식민통치

by mmgoon 2019. 8. 7.

1857년이 되자 루이-나폴레옹은 베트남 침략이 최선의 조치라는 것으로 설득되었고, 이에 프랑스 전함들은 베트남과 어떠한 협상 없이 투레인(Tourane, 다낭)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858년말 투레인이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1859년 초에 쟈딘(사이공, 호치민시)이 함락되었습니다.

이 두 기간 동안 선교사들이 약속했던 베트남 기독교인의 도움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이 후 베트남의 저항과 콜레라, 장티푸스의 발병으로 인해 프랑스는 1860년초에 투레인을 포기합니다.

 

한편 파리에서는 프랑스가 철수하면 영국이 진출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파리에서는 프랑스는 문명화라는 합리화가 있어서 우수한 문화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미개한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생각은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의 식민정책에 대한 공통된 정당화였습니다.)

프랑스의 군사적 사업적 관심이 늘어나면서 정부에 대한 압박도 증가를 합니다.

 

그리하여 1861년 초 프랑스 함대가 전함 70척과 3500명의 군인으로 쟈딘을 공격하였고, 일련의 전투를 통해 주변지역도 장악합니다.

182년 6월 뚜득황제는 프랑스와 사이공 조약에 서명을 하여, 프랑스가 사이공으로 이름을 바꾼 쟈딘과 Poulo Condore 주변 3개 지방을 다스리고,3개 무역항을 개방하고, 프랑스 군함이 메콩강을 통해 캄보디아로 가고, 선교의 자유와 베트남을 공격하느라 입은 손실에 대해 프랑스에게 보상하는 것을 약속합니다.

 

 

 

 

 

프랑스인들 조차도 베트남인이 이러한 굴욕적인 조약에 동의 한 것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지난 900 년 동안 중국인의 침략에 성공적으로 저항 한 후, 군주제가 프랑스의 요구에 너무 쉽게 기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이공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프랑스의 힘에 대한 과대 평가와는 별도로, 수십 년 동안 군주제에 억압 된 사람들로부터 뚜득과 황실이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뚜득은 남쪽에 프랑스인들이 들어옴으로서, 그의 군대를 박보(Bac Bo) 지방에 크게 일어난 기독교인들이 지지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보낼 수 있기를 희망했고, 결국 1865년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 반란을 지원하기를 프랑스 정부에 바랬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수 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반란군과 같이 뚜득의 군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자 환멸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실 선교사나 선교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에 대한 초기 변명으로 만 사용되었으며, 군사적, 경제적 이익이 그 곳에 주둔한 주된 이유였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인도 차이나 정복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1863년, 코친차이나 (남보Nam Bo를 프랑식 이름으로 개명)의 총독 드미랄 드 그란에르 (Demiral de la Grandiere)는 

캄보디아 왕에게 베트남과 맺은 사이공 조약을 프랑스가 승계하였으므로, 프랑스의 보호를 받기를 강요합니다.

1867년 6월, 제독은 남서부 3 개 지방을 점령하여 코친차이나 합병을 완료합니다. 

 

다음 달, 시암(태국) 정부는 캄보디아의 앙코르(Ankor)와 바땀방(Battambang) 두 지역을 

시암에게 돌려주는 댓가로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당시 지도. 사이공이 포함된 코친차이나 (남보)와 북쪽의 통킨(박보)가 보인다.안남은 당시 수도인 후에가 있었다.

 

 

 

코친차이나가 확보됨에 따라 프랑스 해군과 상인들의 관심은 통킨(Tonkin, Bac Bo의 프랑스식 이름)으로 옮겨갑니다.

1873년 하노이 성채로 프랑스 해군 장교인 프랜시스 가니에(Francis Garnier)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돌입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뚜득왕에게 1874.3월 프랑스와 조약을 서명하게 만듭니다.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전체에 대한 "전부이고 전체적인 주권"을 획득하게 되었고, 홍강을 상업을 위해 개방하게 됩니다.

 

통킨만을 확보하려는 시도 동안 가니에는 살해당했고, 그의 군대는 베트남 정규군 및 검은 깃발 군대에 의해 패했습니다.

검은 깃발 군은 태평천국의 난 동안 탈영한 중국군들로 후에 정부에 고용되어 통킨만을 지키는 명령을 받은 군대입니다.

 

검은 깃발 군대

 

 

1882. 4월 프랑스군은 다시 장교 앙리 리비에르(Henri Riviere)의 지도하에 하노이 성채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비에르와 그의 군대는 다시 한 번 가니에와 마찬가지로 베트남-검은 깃발 군대에 의해 패퇴하였습니다.

 

 

 

 

 

가니에가 패배해서 프랑스군은 통킨만에서 일부 철수 하였으나 리비에르의 패배는 프랑스의 군대에 의한 보호국 설립의 의지를 강화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의회는 추가 군사작전을 위한 추가 예산을 승인하였고, 전 달 뚜득왕이 죽고 난 1883. 8월에 수도인 후에는 프랑스군에게 함락됩니다.

 

1883.8월에 하르만드 보호조약(Harmand Convention)이 체결되어 베트남 북부와 중부에 프랑스 보호국을 설립하고, 공식적으로 독립 베트남이 끝납니다.

1884.6월 베트남 관리들은 후에 조약에 서명해 하르만드 조약을 확정합니다.

1884년 말까지 16,500여명의 프랑스군이 베트남에 주둔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통치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1885년 함니(Ham Nghi)왕 주변에서 깐붕(Can Vuong, 왕에게 충성)운동으로 알려진 반란이 학자와 농민 모두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란은 1888년 함니왕의 구금과 추방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함니왕

 

 

학자이자 애국자인 판딘풍(Phan Dinh Phung)은 그가 죽은 1895년까지 저항운동을 계속 했습니다.

비록 프랑스를 몰아내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은 미래 베트남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됩니다.

 

 

 

 

출처 : Ronald J. Cima, ed. Vietnam: A Country Study. Washington: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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