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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베트남 정보

베트남 역사 - 응웬 왕조와 커져가는 프랑스의 영향

by mmgoon 2019. 8. 7.

1802년 응웬안(Nguyen Anh)은 왕명을 쟈롱(Gia Long)으로 채택하였는데, 이는 쟈딘(Gia Dinh, 사이공)에서 '쟈'를 

탕롱(Thang Long, 하노이)에서 '롱'을 가져온 것으로 국가를 전체적으로 통합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쟈롱 황제

 

 

쟈롱은 국가명을 다이비엣(Dai Viet, 대월)에서 남비엣(Nam Viet, 남월)으로 바꿨습니다.

이 새로운 국명은 중국인들에게 찌우다(Trieu Da) 장군이 생각나게 하는 이름이었기에 중국은 베트남이 요청한 국명 글자의 앞뒤를 바꾸어 비엣남(Viet Nam, 월남)으로 바꾸어 국명 승인교지를 내렸고, 이 때가 베트남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진 때였습니다.

 

 

떠이선 혁명을 누르고 만들어진 정부답게 쟈롱 왕가는 관료나 지주에 반하는 세력을 가혹하게 억압했습니다.

 

쟈롱은 통제와 질서를 추구하면서 이전의 베트남 통치자보다 중국 관료적 모델을 더 많이 채택했습니다.

떠이선 반군의 수도였던 푸쑤안에서 북동쪽으로 2km 떨어진 후에(Hue)에 새로운 수도를 지었는데,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따서 만들었습니다.

베트남 관리들은 중국식 관복을 입었고, 중국식 집과, 의자에 익숙해져야 했고, 베트남 여성들은 중국식 스타일 바지를 입어야 했습니다.

 

쟈롱은 중국 청나라와 유사한 법률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법령에 의거해 절대 권력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저항도 엄중한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또한 유교 정권 하에서는 불교, 도교, 및 토착 종교가 금지되었습니다. 

여기에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보호하는 법 조항과 같은 전통적인 베트남 법과 관습은 새로운 법에 의해 휩쓸려 가버렸습니다.

 

떠이선에 의해 감축 또는 폐지 된 세금은 다시 회복되어 응웬(Nguyen) 왕조로 다시 부과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광업, 임업, 어업, 공예 및 소금, 꿀, 향과 같은 다양한 국내 제품에 대한 세금이 포함됩니다. 

 

농민에 대한 또 다른 큰 부담은 도로, 교량, 항구 및 관개 시설뿐만 아니라 궁전, 요새, 조선소 및 무기고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이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특권 계급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일 년에 최소한 60 일 동안 무임금 노동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중앙정부의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쟈딘, 후에, 탕롱을 연결하는 대로가 건설되어 우편과 관료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군복무는 농민에게 또 다른 부담이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세 남자 중 한 명이 베트남 제국 군대에서 복무해야 했습니다. 

 

떠이선 체제 하에서 제정 된 토지 개혁은 회복 된 응웬 왕조에 의해 곧 사라졌으며, 공공 토지의 비율은 전체의 20% 미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비록 쯔놈은 쟈롱왕 때까지는 국가 문자로 살아남았지만 1820년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인 민망(Min Mang)황제 시기에 한자로 변경되었습니다.

 

 

중국 스타일을 좋아했던 민망황제

 

 

 

19세기 전반에 걸쳐 농민들의 반란들이 일어났는데, 이는 정부의 억압, 홍수, 가뭄, 전염벙, 기근과 같은 재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따이(Tay)-능(Nung), 무옹(Muong), 참(Cham)과 같은 소수민족들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이 반란들은 기본적으로 농민들에 의한 것이었지만 어떤 봉기는 학자들과 레(Le) 왕조 생존자들의 지지를 받거나 주도를 했습니다.

 

이 시기 베트남의 대외관계도 중앙정부의 힘을 뺐습니다.

매년 청나라에 조공으로 2년에 한 번 씩 600필의 비단, 200필의 면, 34kg의 향수, 17kg의 알로에 나무, 40kg의 빈랑 나무 열매, 4 마리의 코끼리 상아, 4 마리의 코뿔소 뿔을 바쳤습니다.

또한 매 4년마다 다른 선물들도 바쳐야 했습니다.

 

동시에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1834년 캄보디아를 베트남의 한 성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캄보디아의 반란과 시암(태국)의 개입을 불러왔으며 그 결과 1847년 베트남-시암 공동 보호국이 만들어집니다.

1826-27년 사이에는 라오스인들의 시암에 대한 봉기를 베트남이 지원하는 외교적 모험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응웬 통치자들의 가장 심각한 외교정책상 문제는 점점 수가 늘어가는 프랑스 상인, 선교사, 외교관, 해군 요원들을 통한 프랑스와의 관계였습니다.

 

궁정과 학자들은 선교사들의 영향을 가장 주요한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프랑스의 Society des Missions Estrangers 에서는 1841년에 45만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베트남 기독교인들은 농부와 지주까지 사회의 모든 분야를 포함한 마을의 형태를 띄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마을 주민들은 그들만의 관습, 학교, 계급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유교를 배척하였기에 정부는 이들을 반란의 거점으로 간주하였고, 실제로 반란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존재는 고위층의 일부 지지를 받았습니다.

쟈롱왕은 1824년까지 베트남에 남아있었던 피뇨 드 베하인(Pigneau de Behaine) 주교와 프랑스 해군 고문인 장 밥티스트 샤이노(Jean Baptiste Chaigneau)와 필리페 바니에(Philippe Vannier)에게 특별한 빚이 있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궁정에 일부에서도 왕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서양화를 통해 행정, 교육, 국방 분야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Jean Baptiste Chaigneau

 

 

베트남 남부에서 기독교인들은 환관 레반두엣(Le Van Duyet)의 보호를 그가 1932년 죽기 전까지 누립니다.

그의 사후 곧바로 응웬 정부는 프랑스 선교사와 그들의 영향을 없애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칩니다. 

일련의 칙령을 통해 기독교 관습을 금지하고, 기독교 공동체를 지하로 숨게 하였습니다.

95명의 사제들과 신도들이 다음 사반세기 동안 처형됩니다.

 

 

레 반 두엣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프랑스 정부에 군사적 개입과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 보호국을 설립하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상인들은 베트남에 다시 한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에 있는 프랑스 외교관들은 

프랑스가 아시아에서 발판을 마련하는데 있어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1841년 이후 남중국해에 영구적으로 배치 된 프랑스 해군 또한 선교사들의 생명과 이익을 보호하는 강력한 역할을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파리의 암묵적인 승인으로 해군의 개입이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1847년 프랑스 전함 두 대가 투레인(Tourane, 다낭)에 함포 사격을 가해 5 척의 베트남 선박을 파괴하고 약 10,000명의 베트남인을 죽입니다.

공격의 목적은 실제로는 이미 석방 된 선교사를 석방하는 것이었습니다. 

 

1848년 왕좌에 오른 뚜득(Tu Duc) 황제는 그 후 10 년 동안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를 계속합니다.

선교사들은 루이 나폴레옹 (이후 나폴레옹 3세)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으면 코친차이나 (Cochinchina,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는 2급 권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뚜득 황제

 

 

 

출처 : Ronald J. Cima, ed. Vietnam: A Country Study. Washington: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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