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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베트남 정보

베트남 역사 - 떠이선(Tay Son) 반란

레(Le)와 찐(Trinh) 왕조를 망하게 한 떠이 선 반란(1771-1802)은 빈딘(Binh Dinh)성 떠이선(Tay Son) 마을 출신의 세 형제가 주도했습니다.

호(Ho)족인 형제들은 응웬(Nguyen)이라는 성을 채용했습니다.

 

 

 

첫 째인 응웬 냑(Nguyen Nhac)은 1772년 응웬 왕가를 공격해서 꽝남(Quang Nam)과 빈딘(Binh Dinh)성을 차지합니다.

 

떠이선 운동의 슬로건은 

 

"부자들의 자산을 빼았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다" (뭐... 많이 들어본...)

 

였습니다.

 

떠이선 반군이 통제하는 마을마다 지주와 관료들은 처벌을 받고 그들의 재산들은 재분배되었습니다.

떠이선 반군은 또한 세금을 폐지하고, 토지 기록부를 불태우고, 지역 교도소에서 수감자를 풀어주고, 창고에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배포했습니다.

반군이 점차 강해지자 탈영병, 상인, 학자, 지방관리 등의 지지를 얻게 됩니다.

 

1773년 응웬냑(Nguyen Nhac)은 떠이선의 수도가 되는 뀌년(Qui Nhon)을 점령했습니다. 

1778 년까지 떠이선 반군은 쟈딘(Gia Dinh, 나중에 사이공이라 불리는 현재의 호치민시)을 포함하여 남부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습니다. 

 

남부를 지배하던 응웬 가문은 메콩강 삼각주로 도망간 마지막 응웬 왕의 16세 조카인 응웬안(Nguyen Anh)을 제외하고 모두 떠이선 반군에게 살해 당했습니다.

응웬안은 지지자들을 모아 쟈딘을 다시 탈환 합니다.

이 후 몇 차례 이 도시의 주인이 바뀌게 되다가 1783년 떠이선 형제가 응웬안의 함대를 파괴하고 응웬안이 푸꿕(Phu Quoc)섬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그 후 응웬안은 프랑스 선교사인 피네 드 베하인(Pigneau de Behaine) 주교 (아아- 발음이..)를 만나서 떠이선 군을 물리치기 위해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지 요청합니다.

 

피네 드 베하인 주교는 응웬안의 다섯 살짜리 아들 인 깐(Canh)을 데리고 프랑스령 인도의 폰디체리(Pondichery)로 가서 응웬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 곳에서 지원을 구하지 못하자 그는 1786년 파리로 가서 응웬안을 대신해 로비를 합니다.

이에 루이 16세는 지원을 결정하고 4척의 배와 1650명의 군인들을 뚜아린(Tourane, 현재의 다낭) 항구와 Poulo Condore 섬(현재의 꼰손섬)을 프랑스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파견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인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정부는 왕의 비밀 지령에 따라 약속된 지원을 거부합니다.

결국 피네 드 베하인 주교는 직접 인도의 프랑스 상인으로부터 2척의 선박과 보급품을 모으고, 

프랑스 해국 출신 탈영자들을 고용하여 1789년 베트남으로 향합니다.

 

피네 드 베하인 주교

 

 

 

그 사이에 1786년까지 떠이선군은 찐 왕조를 무너트리고 북쪽을 모두 점령하여 200여년만에 최초로 통일을 이룹니다. 

떠이선군은 레(Le) 왕조를 복원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적어도 의례적인 목적으로 잘 지켰습니다.

세 명의 응웬 형제들은 탕롱(Thang Log, 현재 하노이)에 있는 레(Le) 황제를 인정하면서, 각각 북부, 중부, 남부의 왕으로 스스로 옹립했습니다.

 

그러나 1788년 레 황제가 떠이선을 물리치기 위해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러 북쪽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에 기회를 엿보던 청나라가 베트남을 침략하여 탕롱을 장악하고 레(Le)왕을 '안남(Anam)의 왕'으로 옹립합니다.

 

같은 해에 둘째인 응웬 후에(Nguyen Hue)가 스스로를 꽝쭝(Quang Trung)황제라고 선언합니다.

꽝쭝은 10만의 군인과 100마리의 코끼리로 탕롱을 야간에 공격하여 20만의 중국 군대를 공격해 패퇴시킵니다.

승리 이후 떠이선 지도자는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재건하고 통치를 인정받기 위해 사신을 파견합니다.

 

 

꽝쭝

 

 

 

꽝중은 무역 및 공예품 장려, 휴경지 재배 명령, 현지 상품에 대한 세금 감면 또는 폐지하고, 자신의 마을에 있는 공동 토지를 토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함으로써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베트남 경제를 활성화 시켰습니다.

 

꽝쭝은 또한 새로운 수도를 국가의 관리를 고려해서 베트남 중부의 푸쑤안(Phu Xuan, 현재의 후에 인근)에 설립했습니다.

그는 정부를 군부를 기준으로 재정비해서 주요 보직을 장군들에게 주었고 덕분에 군인들이 민간 공무원의 수를 앞질렀습니다.

베트남어가 중국어를 대신해서 국가 공식언어가 되었으며,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중국어가 아닌 쯔놈(chu nom, 우리의 이두에 해당되는 문자)로 시험답안을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1792년 꽝중은 제대로된 후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사후 파벌주의가 판을 칩니다.

이 때까지 응웬안(Nguyen Anh)과 그의 지지자들은 떠이선 형제중 막내이고 가장 능력이 없는 응웬루(Nguyen Lu)로부터 남부의 많은 지역을 되찾았습니다.

 

 

응웬 안

 

 

1789년 피네 드 베하인 주교가 베트남으로 돌아오자 응웬안은 쟈딘(Gia Dinh)을 장악합니다.

이 후 몇 년간 주교는 응웬안에게 배, 무기, 유럽 군사고문을 들여와 요새, 조선호, 포대, 조병창 건설을 감독케 하고, 베트남인들에게 신식 무기를 제작하고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꽝쭝 사후 떠이선 지도부의 분열, 전쟁에 의한 고통, 자연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떠이선 내부에서도 응웬을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응웬안의 군대는 지속적으로 북쪽을 공략했고 1801년 떠이선의 수도인 푸쑤안을 다음 해에 탕롱을 점령합니다.

 

 

 

출처 : Ronald J. Cima, ed. Vietnam: A Country Study. Washington: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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