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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베트남 정보

달랏(Đà Lạt)의 짧은 역사

by mmgoon 2019. 1. 17.

베트남 남부 고원도시인 달랏(Đà Lạt, 베트남 발음은 다랏에 가깝습니다)시는 람동(Lâm Đồng)성의 수도입니다.

이 도시는 중구 고원지대 랑비안(Langbian) 고지대 해발 약 1,500m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기온은 다른 베트남 지역들과 달리 시원하고 일년내내 비슷한 기온을 보여줍니다. 

네네 베트남 사람들은 겨울에는 춥다라고 하는군요.

 

많은 소나무들과 꽃들이 가득한 이 도시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찾는 관광도시이고 (주말에 차들이 길에 가득합니다 -_-;;;)

배추를 비롯한 신선한 채소와 딸기와 같은 과일들이 나는 곳입니다.

베트남 사는 내내 달랏산 야채들을 먹고 살았답니다.

 

예전에 달랏 놀러가서 여고생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하얀 아오자이에 버건디색 가디건을 입고 있는데 참 귀여웠습니다.

달랏 대학교 여대생들은 외출할 때 꼭 양산을 쓰고 다니기도 했죠. (한 아줌마 증언입니다)

네네, 지금은.... 많이 서구화가 된 관계로 하아-

 

달랏 고등학생들

 

 

 

 

왠지 이렇게 멋질 것 같은 달랏이지만 정작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세기말까지만 하더라도 달랏은 황무지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달랏이란 곳을 개발한 사람들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로 더운 열대성 기후를 피해서 시원한 곳을 찾아 도시를 만든 것이죠.

당시 총독 보좌관이었던 A. Berjoan이라는 사람이 보고서에

 

'달랏은 극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달랏의 기후, 풍경, 확장 가능성을 볼 때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잇점이 있다. 

..... 달랏은 반드시 극동 산악지대 피서지로 개발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

 

라고 썼다고 합니다. 네네 더위에 몹시 지친 느낌이 드네요 -_-;;;

 

다른 제국주의 식민국가들 그러니까 미국이 필리핀의 바기오(Banguio, 해발 1,800m), 영국이 남인도의 오타카문드(Ootacamund, 해발 2,200m), 

네델란드가 자바에 토사리(Tosari)를 개발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식민정부 관료들이 모국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시원한 기후에서 휴가와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이 도시를 개발한 것입니다.

뭐 덕분에 요사이는 관광특수를 누리고 있지만서도요.

 

달랏은 대충 다음의 단계들을 거쳐서 발전을 해왔습니다.

 

1 단계

 

프랑스 사람들이 달랏을 발견한 시기입니다 (1893~1899년)

달랏을 발견한 사람은 옐신(Yersin, 박테리아를 연구한 학자로 베트남에서 연구)이 었고, 

이 후 총독인 P. Dourmer가 이 곳에 휴양지를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2 단계

 

달랏을 건설하는 시기죠 (1900~1914년)

총독인 P. Dourmer가 안크로엣(Ankroet)에 단키아(Dankia) 대신에 달랏을 개발하기로 승인을 했고, 

이 사람이 인도차이나를 떠나면서 개발이 지연되는 시기였습니다.

 

3 단계

 

개발의 재개 시기죠 (1915~1922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달랏은 휴면에서 일어나서 계획도시로 준비 되고 드디어 도시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4 단계

 

도시로 발전하는 시기입니다 (1923~1939년)

인도차이나 총독의 명령으로 건축가인 Hébrard 가 달랏을 디자인하고 건설을 본격적으로 합니다.

 

5 단계

 

프랑스의 본격적인 식민지배 (1940~1954년) 동안 달랏은 발전을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인도차이나의 여름 수도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죠.

 

 

 

달랏이라는 명칭은 지역주민들에게 물어서 결정된 것입니다.

이는 달랏을 세우기 위해 최초로 탐사를 한 꾸냑(Cu-nhac)이라는 사람이 인도차이나에 출간되던 잡지인 

Baudrit지 180호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 호수가 있는 곳에 랏(Lat)이라고 불리던 종족의 거주지를 통과하는 작은 하천이 있었고 이를 다랏(Da-Lat)이라고 불렀습니다 

(다da 혹은 닥dak은 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랏은 랏족의 물 혹은 랏족의 하천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달랏을 만든 프랑스인들은 달랏이라는 말을 라틴어로 풀어내서 모토로 만들죠.

그러니까 달랏을 머리글자로 이용해서 닷 알리이스 라에티티마 알리이스 템페리엠(Dat Aliis Laetitiam Aliis Temperiem)라는 말을 만드는데

'이 친구에게 행복과 다른 건강을 주라' 라는 뜻이 됩니다.

 

예르신(Yersin) 박사는 1899년경 총독인 P. Doume로부터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박사가 이미 발견한 현재의 베트남 중부에 해당되는 안남 남부에서 다음의 조건 그러니까 

적절한 고도, 충분한 면적, 충분한 용수, 기온, 접근성을 만족하는 휴양지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답니다.

 

이 편지에 따라 박사는 랑비안(Langbian)고원의 단키아(Dankia)를 후보지로 추천합니다.

이에따라 초기에는 프랑스인들은 달랏 북서부 약 13km에 위치하는 단키아에 몇몇 시험 기지들을 건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0년에 단키아와 달랏을 지속적으로 조사한 후 총독은 달랏을 선정하죠.

 

1914년 판티엣(Phan Thiet)에서 달랏까지 길이 개통되어 차량으로 달랏까지 이동할 수 있게됩니다.

 

초기 건설시기에 달랏은 도시라기 보다는 프랑스인들을 위한 임시 휴양지였습니다.

이후 행정 기관이 수립되면서 총독관저, 병원, 공사 관저, 인도차이나 방위군 건물을 포함한 몇몇 목조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1907년에 최초의 여관이 문을 열었고 이 후 드락(de Lac) 호텔이 됩니다. 현재는 관광정보안내소입니다.

42일동안 베트남 중부 빈(Vinh)에서 사이공까지 말을 타고 여행한 P. Duclaux는 

여행 중간에 달랏에 들려 달랏의 풍경을 1908년 Indochine 잡지에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달랏! 베트남 사람들이 사는 8개 혹은 10개의 초가집들, 장거리 여행자들을 위해 단순한 목재들로 만든 다리가 높은 집, 

작은 우물, 시장, 소나무 숲 한가운데 울타리 뒤 한적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작은 우체국, 그리고 몇몇 벽돌로 지은 달랏 행정부 건물들....'

 

Duclaux에 의하면 당시에는 달랏에 아줌 많은 수의 호랑이들이 있었고, 사냥꾼들조차도 이들의 위협을 제대로 막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들은 서양인, 가축, 개, 말에게 달려들었다고 하네요.

호랑이 이외에도 늑대들도 자주 출몰해서 해가 지고 외출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고 합니다.

그가 달랏 군사기지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군인 4명을 붙여줬다고도 언급했습니다. 

 

 

초기 달랏 모습이 나온 우편엽서

 

 

 

1920년 판랑(Phan Rang 중부 해안도시)에서 달랏까지의 도로가 완성되었고, 쏨곤(Xom Gon, 하노이 서쪽도시)에서 달랏까지의 철도 공사도 시작되었습니다.

 

1916년 총독인 Roume 은 모든 부대시설을 갖춘 호텔을 짓기로 결정하고 1922년 랑비안 팰리스 호텔(Hotel du Langbian Palace)이 문을 엽니다.

 

1918년경 발전소가 건설되고 1920년 상수도 시설이 건설됩니다.

 

1923년 달랏은 진정한 도시가 되고 건축가인 Hébrard에 의해 도시계획이 작성됩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30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는 도시를 만들어서 달랏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으음 꿈이...

 

1926년 중고등학교인 Le Petit Lycée와 Le Grand Lycée 2개 학교가 착공됩니다. 각각 1927년, 1935년 개교를 하고 이후 1935년에 두 학교는 Lycée Yersin으로 통합이 되고, 현재는 달랏 아동교육대학 (Pedagogical College of Dalat)이 됩니다.

 

1923년 10개의 목조건물만 있던 달랏은 1938년이 되자 398개의 빌라가, 1945년에는 1000개 이상의 빌라가 건설됩니다.

 

1931년 달랏 성당이 착공하여 1942년 완공됩니다. 

 

 

1923년초 달랏의 인구는 약 1,500명이었다가, 1938년 9,500명, 1939년에는 11,500명까지 증가했습니다. 이중 프랑스인이 600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인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되었고, 휴가 기간 동안에 달랏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전쟁기간 동안 본국에서 인력이 파견되거나 물자가 공급되는 것이 막히자, 프랑스 식민당국은 자체 생존 방식을 택했고, 이 결과로 달랏이 휴가지로 더욱 발전합니다. 네네, 전쟁중에도 프랑스는 휴가가 있네요. 

 

달랏은 산악지형이기 때문에 수력발전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1942년경 앙코엣(Ankoet) 폭포를 조사하고, 총독의 명령에 따라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1944년부터 가동을 시작합니다. 

또한 1942년부터 달랏에 야채를 심는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1944년에 이르러서는 잉여 채소를 다른 지역에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발전으로 달랏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1944년경에는 실질적인 수도의 역할을 합니다. 

1944.4월까지 5,600명의 서양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1954년 프랑스인들이 인도차이나를 떠나고, 달랏은 새로운 시기를 맞이합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월남전) 등을 겪는 동안 달랏을 쇄퇴하였습니다.

이 후 1986년 도이모이 (베트남 개방 정책) 이후 달랏은 다시 베트남인들과 외국인들의 관광지로 개발이 시작되었고, 다시 유명세를 치루면서 성장합니다.

 

현재는 호치민 사람들이 사랑하는 관광지로 주말에는 차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그런 도시가 되었습니다.

으음... 달랏을 다시 갈 일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