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12월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인데, 아침에 출근을 해서 책상을 보자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봉투 겉에는 아무런 말이 없이 내 이름과 직책명만 달랑 써 있었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부탁하고 봉투를 열어보니까 하얀 카드에 이렇게 써 있는 것이었다.
' 토끼집 파티'
삼십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계속 느낀 것은 우리나라의 말이란 게 참 어렵다는 것이다.
비록 아직은 머리가 빨리 도는 그런 아침이지만서도 이 두 단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토끼네 집에서 하는 파티
토끼집을 위한 파티
토끼들이 모이는 집파티
토끼의 집파티
토끼집 같은 혹은 그런 모양의 파티
토끼 스타일의 하우스 파티
토끼집 모양 혹은 토끼집 풍의 분장을 하고 모이는 파티
(도대체 토끼들의 집은 어떻게 생겨먹었단 말인가)
궁금증이 나서 안쪽을 봤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즐거운 토끼집 파티에 참가해주세요.
아래 번호로 전화를 주시면 시간과 장소를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는 달랑 휴대폰 번호 하나가 있었다.
"이거 봐 유코야, 이게 뭘까나?"
대답이 없었다.
생각해보니까 유코녀석과 얼마 전에 파스타를 삶는 시간에 대해 조금은 심하게 논쟁을 했는데, 녀석이 삐져서 집을 나간 것이다.
처음엔 며칠이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베트남에 토끼 녀석들의 지부라도 생겼는지 들어올 줄 모른다.
걱정이 안돼는 것은 아니지만 뭐 언제나 녀석이 원하는 대로 사는 그런 식이니까… 걱정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토끼에게 이해를 구하지 말자'
봉투를 옆으로 치워두고 나는 일을 시작했다.
연말이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어느 정도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는 처리할 일들이 꽤나 있었던 것이다.
전화가 왔다.
"hello?"
"sir, here's someone to meet you"
나가보니 s였다.
" 어? 내일 온다고 했었자나"
" 아아 비행기 스케쥴 때문에....자, 여기 부탁했던거"
" 아아 고마와. 나 조금 있으면 끝나니까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구"
그 날 밤 녀석이 가져다가 준 PDA는 손도 못 대보고, s와 신나게 마셔댔다.
또 이런 경우 그러니까 마구 뜯어보고 싶은 물건이 생겼을 때, 늘 귀찮은 출장과 겹치게 되고 결국 며칠이 지나서야 PDA에 손을 댈 수 있었다.
먼저 설치 매뉴얼을 읽었다.
'자 일단 배터리를 넣고 4시간을 충전하란 말이지'
충전하는 동안 잠깐 더 매뉴얼을 보다가 배가 고파져서 파스타를 삶았다.
파스타를 우물거리면서, 같이 구입한 메모리 카드를 뜯었다.
'자, 충전이 됐으면....'
그러나,
PDA 는 전혀 충전이 되어있지를 않은 것이었다.
전기는 들어왔다.
매뉴얼을 찾아보니 충전중에는 왼쪽 위에 있는 LED가 깜빡거리다가 충전이 되면 불이 켜진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PDA는 깜빡거리지도 않고, 전원에서 빼자마자 꺼져버렸다.
아답터의 문제일 수도 있고, 배터리가 불량일 수도 있고, 본체 자체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문제는 모두 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해결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머리 속으로 이 세상의 모든 귀찮음들이 지나갔다 -
이제 이걸 가지고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고, 제조사에 이메일로 문의하고, 누군가 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찾아 부탁하고,
다시 이메일로 부탁을 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가져다가 달라고 부탁을 하고…..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머리가 아파지면서 공연히 화가 났다.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몇 캔인가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그건 이상한 꿈이었다.
'아니 내가 겨우 맥주 몇 병에'
라고 생각하는 순간 잠이 푹하고 들어버렸고, 바로 꿈을 꾸기 시작을 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이곳은 토끼의 집입니다"
"무슨 소리야? 여기는 내 집이라고"
"아아 아아 안되겠군. 여기~"
흰 토끼가 손벽을 짝짝 치자 어디선가 잿빛 토끼들이 우루루 달려 나와 가지고 나를 끌고 작은 방으로 갔다.
그 방안 가운데는 불이 피워져 있었고 큰 통에 물이 끓고 있었다.
이 넘들이 그 통에서 나를 삶을 생각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녀석들은 그 큰 통에다가 당근을 잔뜩 집어넣고 삶기 시작했다.
당근이 삶아지는 냄새가 나자 녀석들은 코를 벌름 거리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당근은 너무 맛이 좋아
그래서 당근이라네
맛이 좋은 당근을 삶아 먹는다네
그럼 더욱 맛이 좋지
랄랄라 라라라
친구에겐 비밀이야
랄랄라 라라라
비밀이라 더 맛있지
이런 노래를 몇 번이고 듣고 있자 당근들이 다 익었다.
녀석들은 당근을 으쌰으쌰 꺼내가지고 큰 주걱 같은 걸로 삭삭 으깨더니 내게 가져와 입을 벌리고 먹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당근은 못 먹는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삶아서 으깬 당근이라니….
"이거봐 싫다구~"
"시끄러 네가 이곳이 너네 집이라고 했어. 그럼 먹어야지!!"
녀석들은 내 배가 거의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삶아서 으깬 당근을 먹이고는 다시 아까의 그 하얀 토끼한테 데리고 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이곳은 토끼의 집입니다"
"무슨 소리야? 여기는 내 집이라고"
"아아 아아 안돼겠군. 여기~"
흰 토끼 녀석이 두 번이나 그것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내게 당근을 먹이려고 하자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내가 버둥거리자 더 많은 수의 잿빛 토끼들이 달려 나와서 온 몸을 잡고 다시 그 큰 통이 걸려있던 방으로 끌고 갔다.
또 새로운 통이 걸려 있었는데, 이 번 통은 더욱 컸으며, 엄청나게 많은 양의 당근들이 그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정말로 저걸 다 먹었다가는 배가 터져 버리거나 당근에 중독이라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 모아서 오른손을 빼내고 왼손을 잡고 있는 녀석들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두 손이 자유로와지자 다리에 붙은 녀석들을 띠어내고 통으로 다가가서 반쯤 삶아진 당근들을 꺼내서 녀석들에 입에 한 가득씩 넣어줬다.
녀석들은 강제로 두둑해진 배를 부여잡고 반은 기분 좋고 반은 억울한 표정들을 지었다.
식식 거리면서 삶지 않은 당근을 하나 손에 들고 흰 토끼 녀석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자 녀석은 나를 보고는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투수가 전력투구를 하는 포즈로 당근을 날렸고 녀석의 뒤통수에 정확히 당근이 맞는 것을 확인했다.
녀석이 '아이쿠 아야' 하면서 머리를 쥐어싸고 넘어지는 것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고 잠이 깼다.
시계를 보자 새벽 2시30분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앉아있자 아깐 마신 맥주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왔다.
앞에는 아직도 왠일인지 충전이라고는 전혀 되지 않는 PDA가 놓여있었다.
이 것만 있으면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건 나의 생활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좋아지리라고 스스로 만족시켜가면서 거금을 저지른 결과로 치기에는 짜증이 나는 모습이었다.
'그래, 베트남에 살면서 영문 윈도우를 쓰고 한글 PDA를 바라는 사람을 위한 기종은 없는 거야'
라는 식의 자조적인 말을 중얼거리다가 맥주를 더 마시려고 손을 뻗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PDA 뒤쪽에 배터리 덮개를 열고 배터리를 꺼내봤다.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뒤집어서 배터리를 넣었다.
전원스위치를 넣자 작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동안 배터리를 꺼꾸로 넣고 충전을 한 것이었다.
정말 머리속에 모든 고민들이 컬럼부스의 달걀처럼 뒤집혀진 배터리 하나에 해결이 되어버렸다.
'망할, 어쩌다가 이렇게 바보가 된거지'
메모리카드를 넣고 - 역시 문제 없이 작동한다. 이거저거 테스트 해보았지만 역시나 문제가 없다.
당연하다. 원래부터 문제는 내게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고나자 더 이상 PDA로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고, 다시 졸려져 버렸다.
'그래 녀석도 충전이 필요할 거야'
라고 생각을 하고는 전원선에 연결하고, 나도 다시 충전이나 하는 듯이 침대로 들어가 잠을 잤다.
이번에는 토끼니 뭐니 하는 녀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유코녀석이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유코? 언제 왔어?"
"아아, 무심하긴 저번에 s씨랑 같이 왔자나요"
"엥? 나는 못봤는데?"
"오오 그거그거 따지고 싶을 정도라구요. 어떻게 팬더군의 건전지 하나를 똑바로 넣지 못하는 거에요!!"
"요사이 좀 바보가 되어가나봐. 하지만 그거랑 유코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유코, 그리고 왜 내 PDA를 팬더군 이라고 부르는 거야? "
"하아, 언제나 이렇게 무심하다니까. 당신은... 솔직히 내가 팬더군을 먼/저/ 만났다구요. 그리고, 인사도 나누고 이름도 물어 봤는데 없다고 해서 팬더군이라고 내가 붙여줬어요"
"먼저 만났다고? 너는 그동안 가출했었잖아. 그리고 팬더군 아니 내 새 PDA는 바로 얼마전에 주문해서 산거라구"
" 흥흥 말도 안돼!!!"
" 뭐가 말이 안돼지? 암튼 지금 나는 잠깐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돼"
이렇게 핑계를 대고 카메라와 PDA를 들고 집을 나섰다.
유코녀석 어디선가 놀다와서는 공연히 둘러대는 것이 분명하고, 이런 맑고 약속 없는 날에는 조용히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리는 더웠다.
한시간 정도 정처없이 걷고 나자 목이 말라왔다.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하고 글이나 써볼까하고 PDA를 켰다.
오늘의 일정이니 받은 메일은 아직 회사 컴퓨터와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비어있었다.
그런데 PDA의 워드프로그램을 시작하자 단 하나의 파일이 눈에 띤다.
'토끼집 파티'
파일을 열자 얼마 전에 받았던 편지의 문구가 나타난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즐거운 토끼집 파티에 참가해주세요.
아래 번호로 전화를 주시면 시간과 장소를 알려 드립니다.
뭔가 토끼의 냄새가 났다.
솔직히 유코녀석 외장하드인 모모군과도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꼼꼼히 PDA를 살봤다.
특별히 수상한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지울 수 없는 토끼의 냄새.
PDA와 같이 구입한 SD 카드도 별문제가 없어보이.......는게 아니다.
1G 용량의 카드가 어쩐지 2 메가바이트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이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잘 뒤져보자 Lepus 라는 폴더가 숨겨져 있다.
" Lepus라면 토끼자리...토끼가 하늘에서 머무는 집. 그렇다고 하더라도 토끼집 파티를 이 PDA의 SD card 2M 메모리에서 할 수 는 없는 노릇이고..."
(요사이 다빈치 코드를 읽고 있어서 왠지 이런 추리에 강해졌다)
궁금해져 버린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기호학은 랭던군의 것이다)
"네~ 유코네 집입니다. 그리고 하숙생을 찾으신다면 지금 판다군이랑 놀러 갔습니다~"
"유코야 왜 거기가 너네 집이야? 글고 하숙생이라니"
"흥흥 솔직히 이 집엔 내가 더 많이 있는다구요!"
"누구누구의 집이라는 건 말이야 거주시간으로 정하는게 아니구..... 아아 암튼 lepus에 대해서 말해바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오오 역시나 역시나 얼마전에 다빈치 코드를 읽더니 기호학에 일견이 생긴거야. 아아 이럴줄 알았어. 당신이 Royal Holloway 출신이란 걸 좀 더 신경썼어야 했는데…”
(참고로 랭던 교수의 여자친구는 Royal Holloway대학 중세학 교수다)
생각해보니 다빈치 코드는 얼마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다.
아직도 유코녀석 내 인터넷 주문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뭐 어찌되었건 그 소설에서 여자주인공이 우리학교 출신이란 것을 알았지만 lepus -> 토끼집은 그런 정도의 기호학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유코야, 화내지 않을 테니까 판다군과 lepus랑 토끼집 파티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바바”
결국 나는 오후에 사진 촬영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서 유코가 그 동안 어디있었는지 왜 이런 일련의 일들이 (게다가 별로 좋지도 않은) 벌어졌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유코의 주장에 의하면,
ㅇ 나랑 말다툼을 하고 핑~ 하고 삐져서 나가긴 했는데
ㅇ 정보부 녀석들이 계속 이쪽에 머물기를 바라고 있고 (솔직히 녀석들 자금사정이 별로라고 했다),
ㅇ 유코도 ‘답답한’ 정보부 녀석들과 같이 있기도 싫고 해서 자연스럽게 돌아올 방안을 찾다가 (토끼들은 참으로 이런데 민감하다)
ㅇ 슬쩍 내가 구입한 PDA에 묻어서 들어오려고 했는데 (역시나 녀석은 해킹을 한다)
ㅇ 이쪽에 와서 머리가 나빠진 내가 배터리를 꺼꾸로 끼우는 바람에 꼼짝도 못하게 되는 바람에
ㅇ 토끼들 본부로 비상연락을 보내고
ㅇ 녀석들은 내 머리를 좋게 한답시고 (토끼넘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당근을 퍼먹이고 (역시나 그건 꿈이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 머리를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ㅇ 결국 유코녀석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알겠군. 그렇게 된 것이군”
“응응. 그런거지”
“하나 이상한건 도데체 ‘토끼집 파티’란게 뭐야?”
“아아 그거그거….”
유코녀석의 설명에 의하면 토끼녀석들은 연말에 반/드/시/ 어디엔가 모여서 파티를 해야 한단다.
겨울잠을 자기 전에 하는 행사인데, 올 해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당근 잊어버리고 빈둥댄 결과겠지만) 그 시기를 놓치게 되었고,
그렇다면 따뜻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보니까 우리집이 생각이 났고, 나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고 있는 유코에게 (말도 안됀다) 부탁을 해서 우리집에서 파티를 열자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문제는 유코녀석과 내가 싸우게 되서 녀석이 집을 나가게 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웅~ 내가 주최위원인데 어떻하죠?”
솔직히 따지고 들자면 “왜 우리집을 내 허락도 없이?” 라든가 “너희들은 항상 그런 식이야!” 라든가 하는 식으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유코녀석 돌아온 것도 반갑고 (사람은 정이란게 있다),
솔직히 판다군도 잘 돌아가는 까닭에
“괜찮아. 내가 조금 도와줄께”
라고 해버렸다.
결국 신이난 유코녀석은 어딘가 분주하게 (내 전화기로) 연락을 해대고 나는 집을 청소했다.
또 녀석은 내 카드를 들고 어디론가 나가서 엄청난 음식과 장신구를 사가지고 왔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토끼집 파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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