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끄적거림들/유코이야기

11 토끼들의 우편서비스




"잠깐 하노이 좀 다녀와야 겠어"

"왜요?"

"그게 이번에 새로온 기술자 녀석이 우리가 보낸 보고서를 이해 못하겠다고 하네"

"아아 또 시작인가"

"뭐 어쨌든지 오후 비행기로 올라가라구"


아침 회의를 마치고 나와서 비서에게 하노이행 비행기표와 호텔 예약을 부탁하고 컴퓨터를 켰다.

이런저런 메일들.

몇몇은 답장을 하고 몇몇은 못본걸로 하고 저번에 보낸 그 리포트를 뒤적거렸다.

큰 문제는 없다. 솔직히 이건 거의 통과의례같은 레포트다. 

아마도 새로운 기술자 녀석이 가호를 잡고 싶었거나 아님 그냥 저녁이나 얻어먹으려는 그런 생각인 것 같다.


"여기요. 여섯시 비행기에요"

"오 땡큐. 호텔은?"

"대우 호텔은 자리가 없다네요. 멜리아로 잡았어요"

"아아 뭐 난 상관없어. 하노이쪽 기사한테 공항에서 기다려달라고 좀 해줘"

"벌써 얘기 했어요"


뭐 하노이 출장인거다.

아무도 이동이라든가 숙소라든가 신경쓰지 않는다. 의례가는 비행기에 의례가는 호텔에 늘 사용하는 기사에 큰 변화는 없다.


전화기를 든다.

내일 아침에 만날 약속을 잡고 특별히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별거 없다. 예상대로의 미팅이 진행될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빈둥대다가 출장가방을 챙겨서 공항으로 간다.

조그마한 국내선 터미널.

기다리다가 줄을 서고 자리를 잡고 안전사항을 구경하고 비행기가 떠나는 걸 본다.

기내식이 나온다. 늘 비슷한 비프앤 누들에 과일이 몇쪽 나온다.

맛은 별로지만 먹어둔다. 내려서 술 한잔이나 할 생각이지 저녁을 늦은 시간에 먹고싶지는 않다.

해가 지는 사이공을 떠나서 비행기는 하늘로 날아가고 맥주 하나를 비우고 잠깐 눈을 감는다.


노이바이 공항에 내린다.

이런 출장에는 짐도 없다. 휙휙 걸어나오자 차가 기다린다.


"굳 이브닝"

"굳 이브님. 메리어트 호텔"


이 길도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잠깐들고 호치민 보다는 어두운 길을 계속 보게된다. 

평소보다 어둡다는 생각도 잠깐하지만 이건 뭐 아무것도 아닌 느낌인 것이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전화기를 든다.


"형 나 하노이 왔는데 시간 괜찮으면..."

"그래 한 번 보자구"


호텔바에 앉아서 예전 학교다날적에 싸구려 소주집에서 히히덕 대던 두 남자가 조용히 분위기에 묻혀서 맥주를 기울인다.


"아 또 움직이고 싶어. 이제 너무 익숙해"

"왜 일이 잘 안돼?"

"아니 뭐 일은 약간 좋고 약간 나쁘고 그런식으로 잘 가고 있어. 요컨데 별 일은 없다는 거야"

"아하 소위 일상성의 고민이라는 거지?"

"뭐 거기까지는 아니고"

"이거보라구. 요사이 난 글하나 쓴적이 없어. 노래 하나 들은 적도 없고. 그래도 뭐냐 잘 사는 편이잖아?"

"아 뭐 그런거지"


맥주를 한 모금 기울이는데 문득


"야. 너 하노이에 재미있는 일이 있다"

"뭔데?"

"얼마전에 서호근처에 토끼가 한 마리 나타났었어"

"그게 뭐 재미있는 일이지?"

"아니 아니 토끼 출현 자체는 별거 아닌데. 재미있는 것은 녀석이 워낙 영리하고 재빨라서 아무도 잡지 못했다는 거야. 

주변에 애들 동네 사람들, 나중에는 경찰들까지 쫓아 다녔는데 아직도 못잡았다네"

"웃기군. 그나저나 서호에 왠 토끼야?"

"몰라. 암튼 소위 uncatchable rabbit인 셈이지"

"하아"


가수의 7번째 노래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로 돌아가나요?"

"아 그래요. 그런데 서호를 한바퀴 돌아서 가줄래요?"


갑자기 토끼 얘기를 듣자 서호를 한 번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혹시나 그 '절대로 잡히지 않는 토끼'를 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호는 조용했고 솔직히 토끼가 실실 거리면서 싸돌아 다닐만한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물론 토끼를 보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 말은 '내가' 토끼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기사 설사 그게 절대로 잡히지 않는 토끼라고 한들 토끼 녀석이 숨어서 봤다고 한들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벨소리를 들은 것은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머리속이 웅웅 거리고 있었지만 확실히 두번째 띵똥하는 소리가 들렸을 적엔 잠이 깼다.

동그란 구멍으로 내다봤더니 처음보는 남자 하나가 매우 피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누구지?" 


나는 문을 열지 않고 물었다.


"저기 ㅇㅇ씨 접니다. 모르시겠어요?"

"도무지 모르겠는걸"

"아아" 


녀석은 탄식하는 소리를 냈고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아아 그렇게 말하지 말라구요. 분명히 ㅍㅍ아파트에 산다고 해놓고 이렇게 호텔에 떠억하니 있으니까.... 하아... 정말로..."


여기까지 말을 했을 적에 드디어 머리가 100% 작동을 했고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 남자를 겨우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아 당신이군"

"겨우 알아보시는 군요. 그런데 저어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됄까요?"


문을 열어주자 녀석은 사악하고 방으로 들어와서 몹시 지친듯이 물을 청하고 물 500미리를 거의 한 번에 다 마시더니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이런 늦은 시간에 왠일이지? 솔직히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

"후우-"


녀석은 숨을 쉬더니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서 내게 줬다.


"이게 뭐지?"

"당신 편지에요. 그리고 여기에 사인을"


녀석은 수취인 명부를 내게 내밀었다. 아무런 이름도 없이 내 이름만 달랑 한줄 써있었다.

서명을 하고 나서 물었다.


"이거봐 이제 정보부가 이런 우편사업도 하는거야?"


녀석은 수취인 명부를 다시 품에 넣고는 나를 바라봤다.


"저기 그게요. 저는 이제 정보부 소속이 아니라 우편국 소속이라구요. 그나저나 뭔가 요기할 거리가 있을까요? 배가 너무 고파서..."


결국 녀석은 룸서비스로 주문한 파스타와 마늘빵을 눈 깜짝 할 사이에 다 먹고는 맥주를 미니바에서 꺼내서 사악 비우고 나서야 그 우편국의 새직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다.

요약하자면, 녀석은 원래 큰 꿈을 가지고 정보부에 들어갔는데, 솔직히 정보부라는 곳이 자기가 생각했던 그런 곳이 아니었고, 

게다가 낙하산 작전이라든가 맥주마시는 작전에서 그리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해서 정보부에서도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 차에 새로 우편국을 설립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거기에 지원해서 이번에 처음으로 배달을 나서게 된거란다.


"그럼 이건 일반 우편인가?"

"아니요. 지금 받아보신 우편물은 저희 우편국의 최상의 도어투도어 서비스로 장차 DHL 이나 Fedex 를 앞지를 그런 서비스에요."

"그래? 그런데 왜 이런 밤중에 배달을 하는거야?"

"그게요... 원래는.... 하루나 이틀만에 배달을 해야하는데요. 아깨 얘기했다시피 ㅍㅍ아파트 산다고 해놓고 이렇게 메리어트 호텔에 계시니까 어떻게 전달을 빨리해요. 

덕분에 공원에서 사람들한테 쫒기고. 흑흑-"

"그럼 그 절대 안잡히는 토끼가 너야?"

"네. 아이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거봐 나는 정말로 ㅍㅍ아파트에 산다고! 그리고 ㅍㅍ아파트는 여기 하노이가 아니라 호치민시야."

"아니 그런데 봉투에는 하노이로 되어있던걸요!!"


봉투를 봤다 정말로 하노이시 ㅍㅍ아파트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ㅍㅍ아파트가 호치민에 있다는 것은 너희 우편국 정도라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왜 사람들을 만나면 토끼 복장으로 갈아입어서 쫒기는 거야. 그냥 원래 모습대로 있으면 토끼인줄 모르는데"

"그게요 우편국 규칙이 그래요.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토끼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구요"


결국 시무룩한 녀석에게 ㅍㅍ아파트는 호치민시에 있다고 정확한 주소를 적어주고 위쪽에 건의해서 토끼복장을 자제하라고 얘기해줬다. 

필요하면 사람인 내 의견을 보내줄 수도 있다고 하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녀석이 떠나자 잠이 쏟아졌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서 '제길 정작 편지는 않읽었군'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나는 꿈나라에 있었다.


다음날은 예상외로 바빴다.

새로온 기술자녀석이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녀석이었고, 나름대로 자리 매김을 하려는지 몇몇 날카로운 질문들과 

몇몇 쓸데없는 질문들로 이거저거 대답을 해주자 시간이 많이 흘렀고 점심식사부터 술을 같이해야 했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더운 기후의 낮술로 공항까지는 쿨쿨 잠을 잤다.

직원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비행기에 오르자 문득 어제밤에 토끼네 우편국에서 전해준 편지가 생각이 났다.


편지봉투에는 보내는 사람이 없이 잘못된 우리집 주소와 내 이름만 적혀있었다.


'누군지 편지쓰는 예의가 없군'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봤다.


짠-

저에요.

하지만 별로 기쁘지 않다구요.

정보부 진급시험에 떨어져서 싸우고 직장을 때려쳤어요.

아아- 그랬더니 돈이 없어요.

그런데 기쁘게도 메이드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제 정보부는 안녕하고 메이드로 일을 합니다. 

야호-

공항에 늦지않게 나와달라구요.


아마도,

유코녀석의 편지인듯했다.

아마도

녀석은 정보보를 그만두고 우리집의 메이드로 들어오겠다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얼마전에 가정부가 그만뒀지만 나는 새로 가정부를 둘 생각은 전혀 없다.

아마도

녀석은 비행기편으로 오는데 편수와 시간은 어디를 봐도 그리고 날짜조차도 써있지 않다.


간만에 너무나 유코같은 편지를 보자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 황당하기도 했다.

문제는 녀석을 어떻게 픽업한단 말인가.


'아이고 하기사 굳이 내가 신경쓸 것은 없지'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부장님, 갔던 일을 다 잘 끝났습니다. 자료 몇개 달라는데 제가 내일 회사가서 만들어 보내죠뭐.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호치민에 도착해서 회사로 전화를 했다. 간만에 일찍 집에가서 파스타나 삶을까 하고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등을 탁- 하고 친다.


"역시나"

"어? 유코야?"

"내 편지 받았죠? 요번에 새로 만든 우편서비스인데 아우- 확실하네요."

"어?"

"아아 저기 차왔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코녀석은 알아서 리셉션에가서 우리집 메이드라고 등록하고는 키를 받아서 집으로 들어갔다.


"음 그럼 이게 내 방인가?"

"유코야 그건 마스터베드룸이야. 내꺼지. 그리고 보통의 경우 메이드는 자기 집에서 출퇴근하는데..."

"아아 그런가요? 그럼 이렇게 해요. 당신이 큰 방을 써요. 그리고 내가 저 작은방을 쓸게요. 그러면 공평? 오케이?"

"하아- 그래 어짜피 갈데도 없을 테니까 이 방을 쓰라구"

"그리고 월급은요? 시간당 200불정도?"

"이거봐 저번 린의 경우는 한달에 100불을 줬다구. 메이드가 뭐하는 직업인지 알아?"

"으음, 그래요. 잘 몰라요. 좋아요 이번이 처음인거 인정해요. 그러니까... 으음 이렇게 하죠. 저번에 내가 여기 살적에 하던식으로..."

"싫어"

"왜요?"

"저번에 니가 카드들고 다니면서 하도 써서 얼마나 고생한줄 알아?"

"흥흥"

"그리고 메이드를 할거면 내일 아침은 빈스온토스트 해줘. 커피도 뽑고"

"앗! 음식은 계약사항에 없다구요. 청소와 빨래만 할거에요"

"이거봐 청소는 원래 아파트에서 다 해주잖아. 어짜피 빨래도 런더리서비스 시킬거면서"


결국 이렇게 티격거리는 사이에 유코녀석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시작 시간이 되어버렸고 아무런 결론 없이 녀석은 티비 앞에서 히히덕대고 나는 저녁을 짓기 시작했다.


"이거봐. 메이드가 이런거 하는거 아니었나?"

"그 문제는 아직 논의중이라구요. 글고 나 생선찌개 먹고픈데"


어짜피 1인분이나 2인분이나 만드는 수고는 같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음식을 만든다.

유코녀석이 큰 말성이나 안펴야 할텐데하는 소심한 생각이나 든다.



'끄적거림들 > 유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다시 돌아오는 길  (4) 2015.02.02
12 갈색 토끼의 비밀  (0) 2006.02.27
02 Dark Side of the Moon  (0) 2005.06.04
유코 이야기는....  (0) 2005.06.01
10 토끼집 파티  (0) 2005.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