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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거림들/호흡짧은글

소주의 복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지하실이었다.

도무지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고 게다가 나는 의자에 앉혀진채로 두손마져 뒤로 묶여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머리는 깨어질듯이 아파왔다.


"이런...제길....이게 뭐야"


말이 끊기면서 입밖으로 새나왔다.


주변은 어두웠고 어디선가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듯도 했지만 주변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는 부족했다.

연신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묶인 팔은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발밑으로 작은 병 하나가 굴러왔다.

주변에 아무 소리도 없었기 때문에 병이 구르는 소리는 마치 큰 바위가 구르는 것 마냥 크게 들려왔다.

발끝에 병이 부딧히자 나는 아래를 내려다 봤다.



Sminoff....

보드카의 빈 병이었다. 상표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지만 병 자체에 각인된 상표로 알 수가 있었다.

분명히 어제 저녁에 방에 앉아가지고 새우를 안주삼아서 저걸 마셨다는 기억이 났다.

도데체 누가 내 방에 엎드려 자고 있는 나를 술병과 함께 이곳으로 끌고왔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누군가 거칠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고 순간 숨을 들이쉬었다.


소주였다.

그것도 녹색의 병을 한 참나무통맑은소주 한 병이 나를 예의 그 푸른 기운을 배출하면서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소주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말도 안되는 일을 함으로 해서 이 나를, 참나무통맑은소주인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하다니. 도데체 정신이 있는 녀석이냐 너는?"

"그건 내 문제가 아닌 너/의/ 그 애매한 태도의 문제라구" 


하는 목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기죽지 않기 위해 낮은 소리를 냈다.


"내 애매한 태도라구?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야?"

"맞아 그런 애매한 태도가 나를 짜증나게 한 것이라구.”

“너는 도데체 어떻게 된 인간이지? 그런 핑계를 대면서 그리고 결구 너의 짜증 때문에 나로 하여금 이 위대한 참나무통맑은 소주인 나로 하여금 

이런 유치하고 저질이고 나랑은 전혀 맞지 않는 일을 시키고 또 나에게 이런 모욕감을 안겨준 너를 도데체 이해할 수가 없어”


“이봐 이봐 이제부터는 참나무통맑은소주 대신에 참통이라고 부르게 해줘. 나는 지금 너무 힘이 없고 속도 쓰리고 머리도 아프고 그러니까”

“뭐, 그건 좋아 이제부터 참통이라고 부르도록 허락해주겠어. 하지만 알아둬 너는 지금 묶여있고 여기는 내 공간이고 

네가 나를 참통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뭐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아”

“뭐시라? 나머지라고? 이거봐 친구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호칭의 길고 짧음이 아니야!! 지금 네 상황을 돌아봐”

“호칭이 아니라면 도데체 뭐가 문제인거지? 너는 영국에 와서부터 항상 그랬어. 그 애매모호함. 

결국은 관계의 문제라고. 관계란건 말이지 호칭에서 출발해서 호칭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또 시작했군. 너의 그 너절한 관계론. 결국 너의 상황은 관계를 만드는데 많은 걸림돌로 작용을 해서 

상황이 왜곡시킨 관계가 참된 관계다라는 말을 역설하려는 거지? 이젠 그런 논리로 나를 누르려고 해도 소용없어”



참통이 이렇게 까지 머리를 썼다면 나의 상황은 정말로 좋지 않은 것이다.

이제 녀석은 성깔을 있는대로 부리다가 이미 자신의 생각으로 한계까지 밀어버린 우리들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결국 머리가 터져버리고 그 터진 머리의 뾰족한 날로 나의 목을 스윽 하고 그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도데체 나의 어디가 문제가 있어서 보드카 따위와 동거를 하는거야!!”

“아니야. 그건 전에도 분명이 말을 했지만 여기 상황을 생각해야한다는 거야. 영국에서는 도무지 너와는 살 수 없는 상황인 걸 너도 알잖아. 

이건 말이지 네가 참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어떤 소주라도 그렇다는 거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드카와의 동거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어. 정 마시고 싶다면 맥주랑 살면 되잖아?”

“너도 도데체 새우와 맥주가 맞다고 생각을 해? 나는 아무리 급해도 그런 일은 하지 않아”

“그렇군. 그런거군. 너는 너의 원칙을 다 지키고 사회에 대한 아무런 물의도 일으키지 않고 밖에서 보면 완벽하게 보이도록 살면서도 

다른 이가 너로 인해 아픔을 겪는 것은 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정말 참통으로서는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이번 상황은 저번에 한국에 있을 적에 고량주에 빠져서 산 것보다 더 심각하게 꼬여서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참통은 열이 오를 대로 올라서 온 방안이 녹색의 빛을 띄고 있었다.



얼마간 울먹이던 참통은 결심이 선 얼굴로 이제 병을깨서 내 목에 그어댈 심산으로 내게 다가왔다


“자아 말해봐. 그러니까 그 증류식 녀석들의 어디가 나보다 더 좋은 거야. 도데체 나와는 동거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녀석들은 끼고 사는 이유가 도데체 뭐야? 

뭐 이젠 그 이유는 상관이 없어. 여기서 우리 둘 그러니까 나를 먹어대면서도 증류식 녀석들과만 동거하는 너와 나 참통은 아에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리는 거야!!!”



나름대로는 심각한 분위기였었다. 하지만 녀석이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적에야 모든 것이 기억이 났고 나는 그 대답을 할 수가 있었다.

약 30분후 나는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고 녀석은 미안하다면서 그리고 오해가 조금 심했던 것 같다면서 나를 풀어주고 팔도 주물러주었다.



사연은 그랬다. 

녀석의 분노로 약간 밝아진 방의 한쪽 구석을 보자 생수병이 하나 눈에 띄었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면서 어젯밤에 새우를 먹기 위해 보드카를 사다가 그 생수를 이용해서 소주랑 같은 도수인 25%로 희석을 해서 마셨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녀석에게 그 생수병을 가리키면서 나는 결코 희석식을 싫어하지 않는다는거 또 아직 절대로 잊지 않았다는거를 말했고, 역시 새우와는 참통이 최고라는 말을 잊지않은 것이다.


내가 어느정도 기분이 나아진 것을 확인하자 녀석은 짐짓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면서


“이봐 정말 미안해. 여기는 너희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야. 나는 그냥 돌아갈께. 바려다 주지 못해서 미안해”


녀석이 나가는데 공연히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버려서 


“이거봐, 다음주 정도에 날씨가 좋아지면 어디론가 같이 여행가지 않겠어? 동거라면 몰라도 같이 여행정도라면…”

“여행이라. 좋을 것 같아. 고마워”


문밖으로 나오자 흐릿한 봄하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역시나 보드카를 25도로 희석해 먹는 것은 좋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느릿하게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