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 베트남은 모계사회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내 친구들을 비롯해서 수 많은 공처가들이 있기도 하지만 (불쌍한 것들)
역사적으로도 걸출한 여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베트남 여성들을 한 번 살펴봅니다.
쭝 자매 (Hai Bà Trưng, 12-43년)
뭐랄까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인들은 바로 쭝(Trung) 자매일 것입니다.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인가 베트남 거리 이야기들을 하면서 언급했던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오늘 날 하이 바 쭝(Hai Ba Trung, 쭝자매) 거리로 남아있죠.
이 자매는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당시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즉 언니인 쭝짝 (Trưng Trắc, 징측, 徵側)과 여동생 쭝니(Trưng Nhị, 징이, 徵貳) 자매는 중국 한나라를 40년에 몰아내고 3년간 베트남을 다스렸죠.
그녀들이 자라는 동안 한나라의 가혹한 폭정을 목격했던 두 자매는 장군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무술과 전투에 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쭝짝은 티삭(Thi Sach, 유명한 사람입니다요)과 결혼했는데 티삭은 문화를 말살하려는 한나라에 정책에 반대했고, 사람들과 반한투쟁을 하다 처형되었습닏.
남편 티삭의 죽음은 쭝자매의 봉기를 가져왔고, 40년 자매가 이끄는 군대는 한나라를 대적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승리로 베트남은 중국 지배후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죠.
불행하게도 3년 후 엄청난 수의 중국군이 침입으로 두 여왕은 수도를 빼았기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핫(Hat) 강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란 (Ỷ Lan, ?~1117년)
이란(Ỷ Lan, 의란, 倚蘭) 부인 실제로는 왕비는 베트남 역사상 유일하게 남편인 왕이 있는 동안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린 왕비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전쟁에 나가있는 동안 베트남을 다스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이란부인 혹은 린냔태후(Linh Nhân thái hậu, 靈仁太后)라고 불렀습니다.
그녀가 이름 없는 동네 처녀이던 시절에, 리탄똥(Ly Thanh Tong)왕은 그의 미래의 부인을 난초화원에서 보았습니다.
왕은 그녀의 말과 사려 깊은 예절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녀를 아내로 선택했습니다.
그녀의 별명인 이란(Y Lan)은 '난초에 기댄'이란 뜻입니다.
1069년 리탄똥왕은 참파왕국과의 전쟁을 위해 수도를 떠났습니다.
이란은 왕이 없는 동안 정사를 보았는데, 남쪽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하에서도 사람들의 생활이 개선될 정도로 성공적인 치세를 하였습ㄴ다.
이런 통치로 인해 안정적인 후방을 확보한 왕은 참파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둡니다.
또한 그녀는 불교를 베트남에 도입하여 사회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녀를 보살로 부릅니다.
왕이 죽은 후 이란 부인은 당시 6세였던 그녀의 아들인 리난똥(Ly Nhan Tong)을 대신해서 섭정을 합니다.
이 때부터 그녀는 린냔(Linh Nhan)태후로 불렸죠.
물론 이 섭정에는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 그녀는 다른 황후를 폐위 시키고 섭정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태후는 매우 현명하고 자비로운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예를 들어 1103년 과부가 되어 몸을 파는 여인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였고,
1117년 농업에 필수적이었던 물소를 죽일 수 없게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후엔 쩐 (Huyền Trân, 1289~1340)
개인적으로 베트남에서 좋아하는 지역인 호이안이 속해있는 꽝남(Quang Nam)성과
그 아래 꽝나이(Quang Ngai)성을 베트남으로 가져온 공주가 있습니다.
공주의 공식 이름은 쩐 티 옥 바오 (Trần Thị Ngọc Bảo, 동씨옥보, 陳氏玉寶)로 후엔짠(Huyền Trân, 현진, 玄珍)은 그녀의 호입니다.
세상에는 후엔짠공주(Huyền-trân công-chúa/玄珍公主)로 더 잘 알려져 있죠.
후엔짠은 베트남 쩐(Trần)왕조 시절 쩐냔똥(Tran Nhan Tong)왕의 딸이자 쩐안똥(Tran Anh Tong)왕의 누이입니다.
1306년에 고대 참(Cham)의 왕인 자야 산하르바만 3세 (Jaya Shinharvaman III)은 2개의 성 그러니까 차우어(Chau O)와 차우리(Chau Ly)를 - 현재의 꽝남과 꽝나이성 - 다이비엣(Dai Viet, 예전 베트남 이름)에게 넘겨주기로 합니다.
다이비엣은 이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 시기는 몽고군과의 큰 전쟁을 끝낸 직후였기 때문에 나라에 재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 결과 정략결혼이 결정되었고, 그 해 6월 후엔짠 공주는 참의 왕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정략결혼은 동맹을 위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었지만 늙은 왕과 결혼해야하는 공주에게는 슬픈 일이었겠지요.
이 후 참왕은 결혼 후 1년 후에 숨을 거둡니다.
문제는...
참의 전통에 의하면 후엔 짠 공주 (이제는 파라메스와리Parameswari 왕비죠) 비록 왕자를 생산했다고 해도 스스로 자결을 해야 했습니다.
다이비엣은 공주의 이런 위험한 상황을 알았고, 쩐안똥왕은 구조대를 참국으로 보내어 성공적으로 후엔짠 공주를 구해옵니다. (네네, 우리 나라의 스토리 전개와는 참 다르죠 -_-;;;)
공주가 참왕국를 떠난 다음부터의 기록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녀가 여승이 되어 조용하게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네네, 누가 알겠습니다. 아름다운 포장일수도)
도안 티 디엠 (Đoàn Thị Điểm, 1704~1748)
도안 티 디엠의 가장 위대한 공로는 그녀의 귀중한 시(詩)들입니다.
그녀의 시들의 대부분은 전장에 남편을 내보낸 귀족 여인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봉건시대의 여성의 인권은 제한적이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귀기울여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녀와 같이 잘 알려지고, 존경받는 여류시인은 매우 귀했습니다.
호는 투이쩌우(Thụy Châu, 서주, 瑞珠), 필명은 마이쿠에(Mai Khuê, 매규, 梅閨) 혹은 홍하여사(紅霞女士)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도안티디엠은 미모뿐만 아니라 문학과 의학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했습니다. (완벽?)
그녀의 나이 16세에 그녀의 수양 아버지는 찐(Trinh)영주에게 결혼시키려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을 합니다.
이 후 그녀의 아버지가 1735년에 죽은 후 도안티디엠은 그녀의 어머니, 조카들의 생계를 책임집니다.
그녀는 교사와 약사로 열심히 일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족들의 교사로 발탁이 되고, 1739년까지 이 일을 계속합니다.
그녀의 주요 작품으로는 여신 리우한(Liễu Hạnh, 도교의 여신)의 일대기와
군인의 아내의 애곡인 당짠꼰(Đặng Trần Côn)의 시를 한자에서 쯔놈 (베트남식 이두문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레 옥 한 (Lê Ngọc Hân, 1770-1779)
베트남 역사상 잘 알려진 여성 중 한 사람입니다.
레옥한 공주는 레히엔똥(Le Hien Tong)왕의 9번째 딸이자 꽝쭝(Quang Trung)왕의 부인입니다.
그녀는 훌륭한 시인으로 대학자였던 응웬후에(Nguy Hue, 이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죠)로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응웬후에는 그녀의 능력으로 인해 응웨후에의 사랑을 받았고,
주요 문서를 관리하는 직책과 여성 학자들의 직위를 결정하는 직책, 아이들과 궁궐 여성들을 가르치는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그년는 문화와 예술분야에 대해 그녀의 남편에게 중요한 조언을 했으며,
응웬냑(Ngyen Nhac)의 반란을 끝내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뚜 두 (Từ Dụ, 1810~1902)
겸손하게 살면서 나라를 현명하게 감시하고, 사람들을 현명하게 대우하며, 아들을 철저히 훈련시키는 여왕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베트남 역사에 이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태후 뚜 두(Từ Dụ, 자유, 慈裕)입니다.
그녀는 14세에 왕비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이 왕(티우찌 Thieu Tri왕)이 되자, 내명부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녀는 다른 왕의 부인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을 잘 대했고, 벌을 주기 보다는 설득을 하는 성품이었습니다
티우찌왕이 죽고 뚜두황후의 아들 홍남(Hong Nham) 왕자가 왕권을 물려받습니다.
그는 뚜득(Tu Duc)왕으로 알려진 인물이죠.
황후 뚜두는 니 티엔 쭝 황 허우 (Nghi Thiên Chương Hoàng hậu, 의천황태후, 儀天章皇后)가 되었고,
그녀의 도덕성과 지혜가 아들의 치세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한번은 왕이 놀이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황후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왕이 이에 사과를 하자
"나라에는 해결해야할 산적한 문제가 있다. 어찌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고 놀이에 빠져있느냐?
내게 미안한 마음이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너의 백성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는 것이다"
라고 했답니다. (뭐랄까 너무 도덕교과서 적인 기록인듯)
1850년 뚜뜩왕이 사냥, 공연에 아직도 빠져있었습니다.
보다 못해서 팜푸투(Pham Phu Thu)가 왕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왕으로부터 무엄하다고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를 들은 황후는
"그 학자가 네게 충언하였을 때 그는 무엇을 얻었느냐?"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어마마마. 그러나 왕을 모욕한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네게 벌을 받은 후 (아마도 직위를 박탈한듯) 네게 어떤 화를 내었느냐?"
"그가 분개하였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고, 아는 바 그는 매일 저녁 강에 가서 자연을 즐기고 시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태후는 왕에게 팜푸투 같은 관리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 가를 설명했죠.
이에 왕은 그의 잘못을 깨닳고 팜푸투를 응웬(Nguyen)왕조의 높은 관료가 되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뚜두 태후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검소함을 추구했고, 그녀의 물건들이 백성의 눈물과 땀이라고 생각해서 최소한의 소유를 추구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를 기리기 위해 현재 호치민시에 보면 그녀의 이름을 딴 병원이 있습니다. (Bệnh viện Từ Dũ)
스웅 우엣 안 (Sương Nguyệt Anh, 1864~1921)
스웅 우엣 안(Sương Nguyệt Anh, 상월영, 孀月英)은 베트남 최초의 여성 편집장입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정복할 때 그녀는 부동산을 팔아 동쥬(Dong Du)군이라고 불렸던 베트남 청년 반군을 조직해서 일본에서 유학을 시켰습니다.
1917년 최초로 여성을 위한 신문인 누 죠이 충(Nu Gioi Chug, 일반여성)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편에서서 침략자들을 규탄했습니다.
스웅 우엣 안은 유명한 학자인 응웬 인 찌우(Nguyen Dinh Chieu, 이분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죠)의 4째 딸입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그녀의 능력, 도덕성과 미모로 유명했습니다.
24세에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았는데, 직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 후로 동주(Dong Du)운동을 시작하기까지는 특별한 기록은 없습니다.
동주 운동운 1906년에 시작해서 그녀가 죽는 1921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녀의 전 일생을 공동체의 사명을 위해 재정적 지원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신문을 발행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1919년 그녀는 시력이 악화되어 고향인 벤쩨(Ben Tre)성의 바찌(Ba Tri)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녀가 사망하는 1921년까지 문학을 가르치고 약제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호치민시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도 있습니다 (홈페이지)
응웬 티 딘 (Nguyễn Thị Định, 1897~1992)
벤쩨(Ben Tre, 메콩강 근처)성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난 으웬 티 딘은 16세에 베트남 혁명당에 가입을 합니다.
이 후 그녀의 전설과 같은 인생이 시작되죠.
20대 초에 그의 남편은 프랑스 당국에 붙잡혀 꼰다오(Con Dao, 베트남 섬에 있던 감옥으로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이 높죠)에 갖힙니다.
이 후 그녀는 딸을 부모님에게 맡기고 고향을 떠나 그녀의 일생을 군에 헌신합니다.
이 여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1959년 식민정부가 비엣민(Việt Minh/ 越盟/월맹, 베트남 독립동맹회의 약자로 1941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의 군대를 제거하기 위해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인민들을 학살할 때 이야기입니다.
장군은 그녀의 군대를 이끌고 공격을 시작합니다.
처음 반란은 벤쩨성 모까이(Mo Cay)에서 시작해서 메콩 삼각주 전역으로 퍼져갑니다.
결국 비엣민이 정치적 승이를 거두고, 사람들은 대규모 학살을 막은 그녀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응웬 티 딘이 이끌었던 군대는 나중에 '긴 머리 군대' 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합니다.
호치민 주석은 그녀에게 다음의 4 단어를 하사합니다.
'영웅, 불굴, 성실, 인내'
이 용감한 장군은 월남전 동안 베트남 인민군으 최초 여성 장군이 됩니다.
그녀는 전쟁중 남부 해방군에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보 티 사우 (Võ Thị Sáu, 1933~1952)
모든 영웅들은 용감했지만 보티사우는 좀 더 특별합니다.
그녀가 사형을 언도받았을 때 그녀는 18세도 되지 않았으며, 죽음을 가장 용감하게 받아들었죠.
보티사우는 14세에 비엣민에 가입하여 지역 게릴라 조직에 몸담았습니다.
14세에 시장에서 프랑스군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져 1명을 죽이고 12명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16세에 비엣민 동조자들을 수 없이 사형집행한 베트남인 수장에게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이 살해 시도는 실패했고 그녀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프랑스 당국은 그녀를 3곳의 다른 시설에 수용했습니다.
그녀의 사형이 가까워 오자 그녀는 꼰다오 섬으로 보내졌습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수형자들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 혁명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고 합니다.
1952.1.23일 그녀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녀는 눈물도 두려움도 없이 사형집행 장소로 갔고,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조국을 바라보기 위해 눈가리개도 거부한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호치민에는 현재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어 그녀를 기억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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