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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베트남 정보

베트남 국가명의 변천




호치민시의 이름과 하노이의 이름 변천에 이어서 왠지 시리즈물과 같은 느낌으로 이번에는 베트남 국가명칭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찾아봤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보시고 혹시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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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랑 

(Van Lang, 2876 BC - 258 BC)


이 시기에는 락비엣(Lac Viet)과 어우비엣(Au Viet) 두 부족이 다른 거주자들과 함께 베트남 여러 지역에 분포해서 살았었다.

이들은 홍수에 대비하거나 침입자들과 싸우고 문화/경제 교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됨에 따라 인근 지역민들끼리 함께 모여 더 큰 규모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락비엣 부족 안에서도 반랑(Van Lang)부족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였다. 

반랑 부족의 대표는 모든 락비엣부족들을 모아 반랑국(Van Lang Nation)을 건립하고 자신을 훙 왕(King Hung)라 칭하였는데, 이러한 명칭은 후세에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학자들은 사료들을 바탕으로 볼 때 반랑국의 위치가 현재 베트남의 중북부와 북부, 그리고 현재 중국의 광서 남부지방에 다다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랑국은 대략 기원전 천 년전부터 300년전까지 유지되었다. 




어우락

(Au Lac, 257 BC -207 BC)


기원전 221년 중국 진나라의 황제였던 진시황제는 비엣(Viet) 부족의 영토를 침범하였다. 


어우비엣(Au-Viet)부족 동맹의 지도자였던 툭판(Thuc Phan)은 전쟁의 지휘자로서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고, 적의 세력은 그 후 기원전 208년 물러가게 된다. 

툭판(Thuc Phan)은 자신의 권력을 발판으로 스스로를 안 증 브엉(An Duong Vuong)이라 칭하며 락비엣과 어우비엣 부족을 통합하여 어우락국(Au Lac)을 건립하였다. 


기원전 207년 남비엣(Nam Viet)의 왕이였던 찌에우 다(Trieu Da)가 어우락국을 침범하여 안즈엉브엉은 곧바로 이에 저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북부 지방의 봉건주의자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700년 동안 이 나라의 통치를 맡게 된다. 

이들은 엄격한 정치 제도를 설립하고 나라를 여러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우락(Au Lac)’이라는 이름은 일상 속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반쑤언

(Van Xuan, 544-602)


542년 봄, 리 비(Ly bi)는 반란을 일으켜 그 지역을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시켰다. 

544년 2월 그는 스스로를 반 쑤언 왕국(Van Xuan)의 황제라 칭하며, 독립정신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우수성이 영구적 평화를 가져올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리 비의 통치는 매우 짧았다. 

그는 중국 제국의 군대에 패배하여, 602년 다시 중국의 봉건적 지배를 받게 된다. 


938년 박당강(Song Bach Dang)에서 벌어진 중국 한족 군대와의 전투에서 응오 꾸엔 장군(Ngo Quyen)이 승리하면서 반 쑤언(Van Xuan)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중국의 베트남 지배시기는 끝나게 되었다. 




다이 꼬 비엣

(Dai Co Viet, 968-1054)


968년, 딘 보 린(Dinh Bo Linh)은 열두 제후를 무찌르고 국가를 통합한다. 


그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국가명을 다이 꼬 비엣(Dai Co Viet)이라 명명하는데, 

이 국명은 추후 딘(Dinh)왕조(Dinh), 전기 레(Le)왕조, 그리고 초기 리(Ly)왕조 시대까지 이어진다. 





다이 비엣

(Dai Viet, 1054-1802)


1054년에 눈부시게 밝은 별 하나가 여러 날 동안 하늘에 나타나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를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이를 계기로 리(Ly)왕은 나라의 이름을 다이 비엣(Dai Viet)이라 바꾸게 되고, 이 명칭은 쩐(Tran)왕조(1126-1400)까지 지속되었다. 


이 후 레(Le)왕조(1428-1788)와 떠이썬(Tay Son)왕조(1788-1802) 시절에도 다이 비엣을 국호로 다시 사용했다. 





다이 응우 

(Dai Ngu, 1400-1406)


1400년 3월, 호뀌리(Ho Quy Ly)는 쩐 티우 에 황제(Tran Thieu De)의 왕위를 빼앗고 호(Ho)왕조를 건립하였으며 국명을 고대어로 ‘평화’라는 뜻을 가진 ‘다이 응우(Dai Ngu)’라 짓는다. 


이 국명은 1407년 4월 명나라의 군인들이 다이 응우를 공격하여 호왕조를 패배시킬 때까지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되었다. 


명나라의 통치(1418-1427)에 대한 저항이 십 년간 계속되던 중, 레 러이(Le Loi)는 승리를 맞게 된다. 

1428년 레 러이는 스스로를 레왕조의 황제라 선포하고 나라의 이름을 다시 다이 비엣(Dai Viet)이라 정한다. 

이 시기, 베트남의 영토는 현재 후에(Hue)까지 확장되어 갔다. 





베트남

(Việt Nam)


1802년, 응웬 안(Nguyen Anh)은 응웬(Nguyen)왕조를 세워 그 자신이 첫 황제임을 선포하였으며 국명을 ‘베트남(Viet Nam)’으로 바꾸었다. 

이 국명은 1804년의 여러 외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공식적인 국가명으로 인식되어졌다. 



베트남(Viet Nam)이라는 단어는 역사의 초반에서도 나타나는데, 14세기 무렵 호똥톡(Ho Tong Thoc)박사가 편집한 ‘비엣 남 테 찌(Viet Nam the Chi)라는 책이나 

학자 응웬 짜이(Nguyen Trai)가 15세기 초에 지은 주 다이 찌(Du Dai Chi)라는 책에서 비엣남(Viet Nam)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응웬 빈 키엠(Nguyen Binh Khiem)박사(1491-1585)는 그의 책 찐 띠엔 신 꾹 응우(Trinh Tien Sinh Quoc Ngu) 첫 장에 “베트남은 이제 그 기반을 완성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베트남(Viet Nam)’이라는 단어는 또한 여러 비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하이퐁(Hai Phong)의 바오 럼(Bao Lam) 사원(1558), 하 떠이(Ha Tay)의 껌로(Cam Lo) 사원(1590), 그리고 박닌(Bac Ninh)의 푹탄(Phuc Thanh)사원(1664)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랑썬(Lang Son) 국경지역의 랜드마크인 투이 몬 딘(Thuy Mon Dinh, 1670) 비석의 첫 번째 문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 곳은 북쪽의 국경을 지키는 베트남의 입구이다”. 



베트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남쪽에서 온 비엣 사람들”이라는 인종적이고 지리적 요소를 의미하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라는 이론들이 있다. 


민망(Minh Mang)황제 (1820-1840) 시대에는 국명이 다이 남(Dai Nam)으로 바뀌었지만, 베트남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많은 문학, 공문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945년 8월 19일의 8월혁명의 승리로 인해 베트남은 봉건제도와 프랑스의 식민지 개입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호찌민 주석은 국가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1945년 9월 2일 정식 국가명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이라고 선포되었다. 

그 후 30년 동안 베트남은 계속되는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받았지만,  ‘베트남(Viet Nam)’은 국가 전역에 널리 퍼져 사용되었으며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자유화 이후, 베트남은 온전하게 하나로 통합을 이루었다. 

1976년 7월 2일 통일 베트남의 첫 국회에서는 국명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 The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이라 명명하였다. 

이 후 1980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헌법은 국가의 공식명칭을 법적으로, 실질적으로 확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