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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호치민 이야기

페트러스 키의 1885년 사이공과 그 주변지역의 역사적 기억 (5)

페트러스 키의 1885년 사이공과 그 주변지역의 역사적 기억
(Souvenirs historiques sur Saïgon et ses environs)

 

 

 

옛 사이공의 마을들과 수로 (2)

 

이제 사이공에서 쩌런(Chợ Lớn)까지 이어지는 오트(Route haute, 대로)를 따라가 봅시다. 

(현재는 모두 호치민시의 응웬 티 민 카이 Nguyễn Thị Minh Khai와 쩐푸 Trần Phú 거리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오래된 도로를 보존하고 확장하고 포장했습니다. 

이 도로는 1790년 사이공과 쩌런을 잇는 직통 도로를 만들기 위해 성채 건설을 담당했던 올리비에(Ollivier)가 처음 건설했습니다.

도로 건설 과정에서 이장해야 했던 무덤마다 가족들에게 세 개의 실과 면 천 조각이 주어졌습니다. 

도로 양쪽에는 망고 나무와 잭프루트 나무가 번갈아 가며 길게 줄지어 심어졌습니다.

고대 성채(옛 법원 Palais de justice이 있던 곳) 오른쪽 모퉁이에는 유황 저장고(쮸옹 지엠, Trường Diêm)가 있었고, 새 법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솜 브엉 밋 (Xóm Vườn Mít, 잭프루트 정원 마을) 또는 솜 봇 브엉 밋 (Xóm Bột Vườn Mít, 꽃과 잭프루트 정원 마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때 이곳에 잭프루트 농장이 있었고, 주민들은 또 밀가루를 제조하고 판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메종 센트랄(Maison Centrale, 감옥)과 새로운 법원이 들어선 지역에는 굽은 줄기를 가진 거대한 반얀트리를 중심으로 쪼 까이 다 콤(Chợ Cây Đa Còm, 굽은 반얀트리 시장)이라는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장에는 음식 외에도 북, 우산, 안장, 그리고 과거 시험 합격자들을 위한 학사모를 전시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사이공 시장 풍경

 

 


시장을 지나 거리 북쪽에는 도시의 비단 무역의 중심지였던 옛 쪼 두이(Chợ Đũi, 생사 시장)가 있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투언 키우 (Thuận Kiều, 현재의 Cách mạng Tháng 8 거리) 길에 도착하기 전에 돗자리와 돛을 전문으로 만드는 솜 뎀 부옴 (Xóm Đệm Buồm) 지역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쪼 두이 (Chợ Đũi)'라는 이름은 보레스 거리(Rue Boresse)의 위쪽 전체, 즉 철도 노선과 주변 지역 (현대 푸동 Phù Đổng 육거리 교차로 주변 지역)을 통틀어 사용됩니다.

투언 키우 (Thuận Kiều) 길을 따라 종마장으로 가는 길에 까이 다 탕 모이(Cây Đa Thằng Mọi) 또는 디우 키엔 (Điều Khiển) 시장을 지나게 됩니다. 

까이 다 탕 모이는 "노예들의 반얀트리"를 뜻하고, 디우 키엔은 군 감독관의 직함이었습니다. 

이 시장을 군감독관이 건설하고 개장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노예의 반얀트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이 이름은 이 시장에서 거래되던 상품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시장에서는 흑인 노예처럼 생긴 테라코타 촛대를 전문적으로 취급했는데, 촛대 머리에는 등불이 달려 있었고, 촛대 안에 땅콩이나 코코넛 오일을 심지에 담가 두었습니다.

이 시장은 메종 블랑쉬베(Maison Blancsubé, 1879년부터 1880년까지 사이공 시장을 지낸 쥘 블랑쉬베(Jules Blancsubé,)의 저택으로, 나중에 블랑쉬베 거리(지금의 꽁 뀐 Cống Quỳnh 거리)가 됩니다) 앞에서 철도까지 뻗어 있었으며, 주택과 상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무덤 평원(Plaine des tombeaux), 1867년

 

 

 

종마장에 도착하기 전, 무덤 평원(Plaine des tombeaux)의 물이 메종 블랑수베(Maison Blancsubé) 뒤편의 수로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도로 구간의 지면은 항상 젖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느억 니(Nước nhĩ), 즉 줄줄 흐르는 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종마장 근처에는 쟈롱 (Gia Long) 왕조 시대에 고대 캄보디아 성소 자리에 세워진 킴 쭈옹 (Kim Chương) 사원이 있습니다. 

이 사원은 그곳에서 일어난 두 가지 암울한 사건으로 유명해졌지만, 두 사건 모두 여전히 미스터리에 싸여 있습니다.

전쟁 중에 쟈롱 (Gia Long) 왕의 삼촌인 응웬 푹 투안 (Nguyễn Phúc Thuần, 쥬에 똥 Duê Tông) 경과 응웬 푹 즈엉 (Nguyễn Phúc Dương, 먹 부옹 Mục Vương) 왕자는 떠이썬(Tay Sơn) 반군의 손에 넘어갑니다.

먼저 1776년 바싹 (Bassac, 현재의 까마우 Cà Mau)에서, 두번째는 그 직후 바밧 (Ba Vát , 예전에는 빈롱(Vĩnh Long )성, 현재는 벤째(Bến Tre )현, 모까이 (Mỏ Cày ) 북동쪽)에서 반군의 손에 넘어갔으며, 두 사람 모두 1776년 이 사원에서 처형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캄프 데 마레스(Camp des Mares, 현대 꽁 꾸인 Công Quỳnh - 팜 비엣 찬Phạm Viết Chánh 교차로 남쪽 지역에 위치)는 오늘날 안남(Annamite) 소총병들의 막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때는 히엔 쭝 뜨(Hiển Trung tự, 찬란한 충절의 사당) 즉 미우 꽁 탄(Miếu Công thần,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었습니다.

쟈롱(Gia Long)왕의 명령으로 건립된 이 사당은 옛 왕실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정부는 정해진 시기에 엄숙하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사당에는 국가에 헌신한 모든 공로자들의 위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자롱을 섬기다 전사한 여러 프랑스인들의 위패도 이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이공 주변 – 어부들의 집

 

 

현재 안남 저격군 장교들이 거주하는 곳에 있었던 또 다른 탑은 성벽 앞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양옆으로는 수련이 심어진 두 개의 연못이 있었습니다.

수련은 왕도 전체에 향기를 퍼뜨렸습니다.

이 탑 역시 자롱 왕조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미에우 호이 동(Miếu Hội Đồng) 또는 미에우 틴(Miếu Thính)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옛날에는 이 두 탑을 지나는 길 양쪽 끝에 각각 하나씩, 두 개의 벽돌 기둥에 "쿠인 까이 하 마 (Khuynh cái, hạ mã, 모자를 벗고 말에서 내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사이공 식물원과 동물원에 속한 실험 농장인 Ferme expérimentale des Mares를 지나면 스트라티쥐키 (Stratégique) 거리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한때 쭈아 옹 푹 (Chùa Ông Phúc) 또는 쭈아 팟 론 (Chùa Phật Lớn)이라는 이름의 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었습니다.
락 꺼우 바 도(Rạch Cầu Ba Đô)의 수원지로 이어지는 개울을 지나면 두 왕자 즉 황투이(Hoàng Thùy)와 황 쫏(Hoàng Trớt)의 무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응웬 반 냑 (Nguyễn Văn Nhạc, 떠이선 왕조 따이 득 Tâi Đức (1778-1793))의 아들들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에는 한때 쪼 마이 (Chợ Mai, 아침 시장)라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쪼 꽘 (Chợ Quán) 거리 (현재의 쩐 빈 쫑 Trần Bình Trọng 거리) 맞은편 평야에는 한때 킨 띠엔 (Kim Tiên) 사원이 있었고 그 기초 위에 년 손 쭈 (Nhôn Søn Tự)라는 또 다른 사원을 세웠습니다.

로피탈 거리(avenue de l’Hôpital)에는 한때 쟈 디엔(Gia Điền)이라는 또 다른 사원이 있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쩌런 시장 풍경

 

 

 

쩌런으로 향하다 보면 먼저 솜봇(Xóm Bột) 마을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길 양쪽에서 밀가루를 만들어 팔던 곳입니다.

이 마을을 지나면 쩌 홈(Chợ Hôm, 저녁 시장) 시장에 도착합니다.

이 시장 뒤편에는 쟈롱 왕이 떠이선(Tây Sơn)에게 살해된 고관 중 한 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쩐 뚜옹(Trần Tướng) 사원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중국인 묘지의 탑들이 있는 작은 수로에는 꺼우 린 옌(Cầu Linh Yển)이라는 작은 다리가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옌이라는 병사가 떠이선(Tây Sơn)의 추격자들을 피해 도망칠 때 쟈롱(Gia Long)왕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다리에서 다른 병사가 그를 대신했습니다. 

기진맥진한 옌은 잠시 쉬려고 멈췄지만, 떠이선이 도착하여 그를 처형했습니다. 

쟈롱은 이곳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탑을 세웠습니다. 

이 마을은 떤 투언(Tân Thuận) 또는 함 르엉(Hàm Luông)이라고 불렸습니다.

여기, 큰 타마린드 나무 그늘 아래에는 꽌 반 예(Quán Bánh Nghệ)라는 여러 개의 꽌(Quán, 숙소)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쩐 흥 다오 (Trần Hưng Đạo) 거리까지, 집들이 모여 솜치(Xóm Chỉ)의 일부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사이공으로 돌아가기 전에 고대 쩌런(Chợ Lớn)을 거닐어 보면서 (당시에는 쩌런과 사이공은 다른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호치민시로 편입되었습니다) 대로 (Route haute) 남쪽에 있는 장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원래의 쩌 런(Chợ Lớn, 큰 시장이라는 뜻) 시장은 오늘날 쩌 라이(Chợ Rẫy) 시장 자리에 있었습니다.

 

 

1874년 쩌런의 지도

 

 

 

쩐 흥 다오 (Trần Hưng Đạo) 거리와 쩌런 (Chợ Lớn) 수로 사이 지역은 베트남 의상을 입고 왕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마을에 살았던 중국 혼혈인 민 흐엉(Minh Hương)족이 거주했습니다.

쩌런 거리에는 따우커우(Tàu Khậu)'라고 불리는 벽돌집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이 상점들은 매년 한 번씩 해상 정크선을 타고 중국에서 온 중국 상인들에게 임대되었습니다. 

그들은 사이공에 머무는 동안 이 상점들에 상품을 들여와 도매 또는 소매로 판매했습니다.

이 수로(지금의 하이 투안 란 옹 Hải Thuan Lãn Ông 거리)를 건너 현재의 도시 시장(현대 쩌런 우체국 부지에 있음)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주변 상인들이 여러 종류의 사탕을 팔았기 때문에 꺼우 등 (Cầu Duờng) 즉 설탕 다리라고 불렸습니다.

초론의 독푸(Đốc Phủ) 즉 주지사였던 도 후 푸옹 (Đỗ Hữu Phương, 1840-1914)의 집 앞을 지나는 운하의 가장자리는 포셉 (Phố Xếp) 거리 (지금의 쩌우 반 리엠 Châu Văn Liêm 거리)를 형성했고, 까이 마이(Cây Mai, 현대의 응웬 짜이 Nguyễn Trãi 거리)로 이어지는 이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까우 포(Cau Pho)로 명명되었습니다.

시장에서 철교까지 이어지는 운하가 굽어지는 곳에는 꾸이득 (Quới Đước) 마을과 쩌 킨 (Chợ Kinh) 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03년 코친차이나 시절 쩌런을 흐르는 수로

 

 


퐁 뒤 마르쉐 (pont du marché, 꺼우 등 Cầu Duờng)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쩌런 수로는 꺼우 캄 사이 (Cầu Khâm Sai)와 로 곰(Lò Gốm) 개울까지 이어지며 집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현재 쩌런(Chợ Lớn)에 있는 교회 (이전에는 파리 거리 rue de Paris 위쪽에 있던 생미셸 St-Michel 교회, 현재의 풍 흥 Phùng Hưng 거리) 자리에 있는 로렌(Lò Rèn) 시장은 쏨 머우 따이 (Xóm Mậu Tài)에 살던 대장장이와 철선 제조업자들이 살았습니다.

북쪽으로 까이 마이 (Cây Mai) 사원으로 가다가 꺼우 옹 띠우 (Cầu Ông Tiều) 다리를 건넜습니다.

까이 마이 사원은 원래 캄보디아의 성지로, 사방이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매년 부처님을 기리는 보트 경주가 열렸습니다. 

이 사원은 안남족에 의해 복원되었습니다. 

민망(Minh Mạng) 통치 시절, 고관 판탄잔(Phan Thanh Giản)과 함께 코친차이나로 온 응웬 찌 푸옹(Nguyễn Tri Phường) 장군이 사원에 2층 건물을 헌정했습니다. 

사원의 이름과 사원이 서 있는 언덕은 그곳에서 자라는 살구나무에서 유래했는데, 살구나무의 흰 꽃은 중국인과 안남족에게 매우 귀중하게 여겨졌습니다.

현재의 쩌런의 검사소는 한때 떤롱(Tân Long) 현청과 행정관저가 있던 자리에 있습니다.

이제 되돌아가서 쩌 꽌(Chợ Quán)으로 향합시다.

떤 키엥 (Tân Kiềng), 년 쟝 (Nhợn Giang), 빈 옌 (Bình Yên) 마을에도 사용되는 쩌 꽌 (Chợ Quán)이라는 이름은 원래 쩌 꽌 병원 (l’Hôpital de Cho-quan) 거리의 큰 타마린드 나무 아래에 있던 시장의 이름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숙박업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쩌(Chợ, 시장) + 꽌 (Quán, 숙소) 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1889년에 그려진 쩌꽌에 있는 페트뤼스 키(Petrus Ky)의 집 그림

 

 

 

로피탈 거리(avenue de l’Hôpital)와 캄프 데 마레스(Camp des Mares) 실험 농장 사이에는 소위 "창립자들의 마을"이라고 불리는 년 아이(Nhón Ngãi, 오늘날의 년 지앙 Nhón Giang)가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고대 캄보디아 마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한때 벽돌 탑이 있는 거대한 캄보디아식 탑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발굴 작업에서 캄보디아식 벽돌, 테라코타 수련, 청동과 돌로 만든 작은 불상이 발굴되었습니다.

부조로 장식된 고광택 화강암 두 블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쩌콴(Chợ Quán, 년장 Nhơn Giang)에서 꺼우 코(Cầu Kho)로 내려가는 길 주변 지역에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집들이 점점이 박혀 있습니다. 

쟈롱(Gia Long) 시대에는 메종 블랑쉬베(Maison Blancsubé)까지 이어지는 이 길의 첫 번째 구간에는 비참한 거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떠이선 군이 쟈롱 왕을 추격하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은 거리에 모여 북을 두드리며 끔찍한 소란을 피웠습니다. 

떠이선 군대는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다고 판단하고 멈춰 섰고, 쟈롱 왕은 도망쳤습니다. 

후에 쟈롱 왕은 이 거지들이 자신에게 베푼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을 위한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마을은 떤 록 프엉(Tân Lộc Phường)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종 블랑수베(Maison Blancsubé) 뒤편 수로 위에 있는 다리는 쌀을 팔던 곳이라 꺼우 가오(Cầu Gạo, 쌀 다리)라고 불렸습니다. 

옛날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곳에서 쌀을 재배하고 돗자리도 만들었습니다.

 

 

수로변에 정착한 상선들



 
메종 스푸너(Maison Spooner) 앞에서는 사람들이 솜 라 부온(Xóm Lá Buôn)이라는 마을에 모여서 흰 잎 종이인 라부온(lá buôn)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감옥으로 가는 길가에는 정부 관리들과 관료들이 소유한 여러 채의 별장들이 보입니다. 보레스 거리(rue Boresse) 끝에는 꺼우 꽌 (Cầu Quan, 관료들의 다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막-마옹 거리(rue Mac-Mahon, 현대의 남 키 코이 냐 Nam Kỳ Khởi Nghĩa 거리)를 따라 무아 거리(rue des Moïs)로 올라가면, 고대 성채 구역 밖에 위치한 새로운 사법궁 (Palais de justice), 정부궁 (Palais du gouvernement), 그리고 샤슬루-로바 대학(College Chasseloup-Laubat)을 지나게 됩니다.

대환관 레 반 쥬엣 (Lê Văn Duyệt) 시대에는 레 반 주엣의 아내 인 딘 바 론 (Dinh Bà Lớn)의 저택, 총독의 별장(냐 화, Nhà Hoa), 극장 (냐핫, Nhà Hát), 그리고 궁도장(쯔옹 나, Trường Ná)이 있었습니다.

라노(Lanneau)의 집 옆에는 아직도 두 그루의 카수아리나스(casuarinas) 나무가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한때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신성한 장소인 넨 싸 딱 (Nền Xã Tắc)이 있던 곳입니다.

이 도시 공원은 이전에는 실크를 표백하고, 바느질하고, 판매하던 솜 루아(Xóm Lụa, 실크 마을) 였습니다.

 

 

카수아리나스(casuarinas) 나무

 

 

 

전략 도로(Route stratégiqu)를 따라가다 보면 쏨 투언 (Xóm Thuẫn, 케이크 마을), 쏨 쩌우(Xóm Chậu, 도자기 마을), 쏨 꾸 까이(Xóm Củ Cải, 순무 마을) 들을 지나게 됩니다.

지금 우회전하여 모아 거리(rue des Moïs, 현재의 응웬 딘 찌우 Nguyễn Đình Chiểu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두 번째 아발란쉐 다리(pont de l’Avalanche)에 도착합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 포토(Potteaux)의 저택 맞은편에 옛 사이공 감옥이 있고, 조금 더 나아가면 옛 코끼리 공원과 묘지와 두 번째 아발란쉐 다리 사이에 있는 쩌봉(Chợ Vông)이라는 시장이 보입니다.

 

 

1790년경 성채 동쪽 지역을 보여주는 1815년 지도

 



세 번째 아발란쉐 다리, 꺼우 솜 키우(Cầu Xóm Kiều, 현재 떤딘 Tân Định), 그리고 쩌 싸 따이 (Chợ Xã Tài) 시장 사이에는 한때 72개의 탑이 있는 큰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아발란쉐 다리(pont de l’Avalanche)에서 아발란쉐 수로 (arroyo de l’Avalanche) 입구까지 내려가 봅시다.

두 번째 다리는 원래 꺼우 까오 멘 (Cầu Cao Mên, 캄보디아 다리)으로 불렸지만, 우리는 이 다리에 꺼우 화(Cầu Hoa)라는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호아(Hoa)라는 단어는 왕족의 왕자들이 사용했기 때문에 존중의 의미로 금지되었고, 이후 이 다리는 꺼우 봉(Cầu Bông)으로 개명되었습니다.

떳 꺼우 손(Tắt Cầu Sơn)이라고 불리는 수로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첫 번째 다리는 꺼우 손(Cầu Sōn, 칠기 다리)이고 두 번째 다리는 꺼우 러우(Cầu Lầu, 높은 지붕 다리)였습니다.

첫 번째 다리와 아발란쉐 수로(arroyo de l’Avalanche) 자류에 붙어있는 티예 (Thị Nghè) 혹은 바 예 (Bà Nghè)라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위 관리 반 쭈엉 허우(Vân Trường Hầu)의 딸인 응웬 티 칸(Nguyễn Thị Khánh)은 옹 예(Ông Nghè, 학사 또는 대학원 졸업생)라고 불린 지방 행정관청에 종사하는 학자와 결혼했습니다.

남편이 매일 관청에 출퇴근할 때 수로를 쉽게 건널 수 있도록 그녀는 다리를 건설했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티 예(Thị Nghè) 또는 바 예(Bà Nghè, 학사 부인)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수로에도 같은 이름이 붙었습니다.

 

 

시장에 쌀을 팔러 가는 상인들

 

 

 

티 예에 있는 생트 앙팡 (Sainte-Enfance)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 앞에는 매년 왕실 행사인 띡 디엔(Tịch Điền, 경작 의식)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논이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최초의 농기구를 발명하고 농업의 신으로 숭배되는 중국의 황제 신농(神農)으로도 알려진 탄농(Thần Nông)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된 제단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과 아발란쉐 수로 (Arroyo de l’Avalanche)와 사이공 강둑 사이에는 공자를 모시는 큰 사찰인 반 탄 미에우(Văn Thánh Miếu)가 있었습니다.


고대 사이공과 그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이 여정을 현대 도시 여행과 비교해 보면, 사이공이 오랜 세월에 걸쳐 겪은 급격한 물리적 변화를 볼 수 있으며, 이는 인간사의 불안정성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지난 세기 동안 거의 무시당했던 프랑스의 활동 덕분에, 훗날 왕의 거처이자 임시 수도가 된 마을들로 조직되었던 이 나라는 이제 정비되고 화려하게 단장되어 6개 지방의 수도이자 극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