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러스 키의 1885년 사이공과 그 주변지역의 역사적 기억
(Souvenirs historiques sur Saïgon et ses environs)
레 반 쥬엣 (Lê Văn Duyệt )이 통치한 사이공
이제 죽을 때까지 사이공에 살았던 “위대한 환관”의 통치를 살펴봅시다.
당시에는 옹 란 퉁 (Ông Lãn Thượng)이라고 불려졌던 레 반 쥬엣(Lê Văn Duyệt)은 민망(Minh Mạng)황제 시절 초기에는 비록 몇 차례 캄보디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을 나서기도 했으나 쟈롱의 치세동안 국가를 평화적으로 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는 “캄보디아인들의 공포”로 알려졌으며, 정직하고 강직하여 안남 관리들에게도 엄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절대적이었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불가침적인 통치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왕실 사업부의 사전 허가 없이도 사형은 언도하고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고도 단순한 보고서만 내면 되었죠.
이런 절대적인 권력을 이용해서 국가를 완벽하게 조용히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개인적이고 공적인 삶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그의 관료 경력을 한 번 살펴봅시다.
그는 싸움을 좋아해서 사람들이 호랑이나 코끼리와 싸우는 일종의 경기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닭싸움과 극장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가 쉴 때 즐기는 여가였습니다.
매년 신년 (뗏Tết) 직후 그는 무덤의 평원 (Plaine des tombeaux, 동 땀 쩐, Đồng Tập Trận)에서 사이공 6개 지역의 군대를 사열했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 폴리곤 (Polygone, 큰 군사훈련 지역으로 당시 Polygone d’Artillerie로 불렸고, 이후 병영으로 재개발되어 1954년 이후 남베트남 육군 3군단 본부인 Camp Lê Văn Duyệt이 된 곳)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사열의 목적은 정치적, 종교적 심지어 미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약간은 과장되게 그가 모든 반역에 대해 벌을 줄 수 있음을 나타내고, 동시에 악령을 쫒아내는 목적이었죠.
이 행사를 라빈(Ra Binh)이라고 했는데, 행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새 해 첫 달 16일 전날 밤 총독은 금식과 금욕 후 제복을 차려입고 절에서 왕에게 제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대포 3발을 쏘고, 가마에 올라 그의 군대를 대동하고 행진을 합니다.
그는 쟈딘문(Gia Định Môn)이나 피엔안문(Phiên An Môn)을 이용해서 성을 나가서 차바이(Chà Vải)쪽으로 향해 막-마혼 거리 (rue Mac-Mahon, 현대의 남키코이냐 Nam Kỳ Khởi Nghĩa 거리)를 지나 의례가 개최되는 모숭(Mo-sung) 지역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대포가 발사되고, 군대들이 기동하고, 코끼리들이 훈련을 했습니다.
총독은 그리고 나서 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해전에 참석했던 조선소로 향합니다.
이 의식동안 사람들은 큰 소리들을 내고 폭죽을 터트리면서 집안에 악령을 쫒습니다.
두번째 뗏 (Tết,) 그러니까 음력 5월에 총동은 띡디엔 (Tịch Điền, 쟁기질) 행사를 가지면서 그의 국민들에게 일의 모법을 보입니다.
이 행사의 장소는 티에(Thị Nghè)에 있는 성 바울 수녀회 병원 바로 앞쪽이었습니다.
민망(Minh Mạng)왕 통치시절의 사이공
민망(Minh Mạng)왕의 통치시기로 넘어왔습니다.
민망왕의 대관식을 맞이해서 레 반 쥬엣 총독은 후에로 갔습니다.
이 시기 통킹의 총독은 그의 전우인 응웬 반 티엥(Nguyễn Văn Thiêng)이었습니다.
민망왕은 그의 정적들을 제거한 이후 그의 계획을 계속 방해하는 두명의 전쟁영웅들을 제거하는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즉 중부군의 지도자이자 통킹의 총독 인 응웬 반 티엥과 후에에 머물면서 왕의 계획을 방해하는 프랑스를 존경하는 위대한 환관 레반쥬엣을 말입니다.
왕은 이들을 반역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왕은 이들의 비서들과 도장 관리자들을 매수했습니다.
왕은 통킹의 총독부터 시작했습니다.
티엥 총독과 그의 아들의 서신을 위조해서 이 서신이 중간에 가로채져서 민망왕에게 전달되도록 했습니다.
조작된 서신은 통킹 총독 아들의 필체에 총독 자신의 도장이 있었습니다.
민망왕은 즉각 통킹에서 티엥 총독을 소환하였습니다.
증거는 명백했습니다.
티엥과 그의 아들은 자살을 명령 받았습니다.
땀 반 찌우 디엔(tam ban triều diện)이라고 불리는 이 특별한 자살은 다음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엇습니다.
즉 (1) 3m 분홍 비단천을 이용해 목을 매어달거나 (2) 사약을 선택하거나 (3) 목을 자를 수 있는 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레반쥬엣은 그의 오랜 친구가 왕의 이중성으로 인해 눈앞에서 선고를 받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도 결국에는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왕궁을 떠나 집으로 가서 그의 도장이 제자리에 있는가를 살펴봤습니다.
도장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의 도장관리인을 찾았으나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우물 옆에 있었습니다.
관리인을 뒤지자 도장은 없어졌고 아직 날인되지 않은 조작된 편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도장 관리인은 바로 목이 달아났습니다.
레반쥬엣은 민망왕을 찾아가서 남쪽 코친차이나는 도적 집단들이 있어 그가 있어야 이런 무질서를 끝낸다고 위협했습니다.
민망왕은 그를 후에에 잡아둘 용기가 없었고 그가 스스로 왕정에서 떠나겠다고 하자 보내줍니다.
레반쥬엣은 다시 사이공 총독으로 돌아와 짜빈(Trà Vinh)에서 일어난 1822년 캄보디아인들의 반란을 제압하고, 코친차이나 남부에서 그가 죽는 1831년까지 머뭅니다.
레반쥬엣의 사후 그에게 악의를 품고있었으나 생전에 대들지 못했던 민망왕은 유치한 복수를 합니다.
민망왕은 레반쥬엣의 무덤을 사슬로 묶고 봉분에 100대의 장을 치게합니다.
이 비열하고, 부끄럽고, 비참한 복수는 지아롱(Gia Long), 티엥(Thiêng), 보딴(Võ Tánh,), 프랑스 장교를 비롯한 수많은 용맹한 전우들과 함께 떠이선 반군을 격파하고 안남왕국의 통일을 이룬 그의 신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복이었습니다.
레반쥬엣의 무덤은 결국 민망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티우찌(Thiệu Trị)에 의해서 복원되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쨔딘 조사부(Inspection de Gia Định) 바로 앞에서 지금 프랑스 정부로부터 보수와 관리를 받고 있는 그의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쥬엣의 사후 사이공의 보찬(Bố chánh)이었던 박 쑤안 응웬(Bạch Xuân Nguyên)은 민망왕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총독의 기록을 조작해서 조사보고서에서 쥬엣이 독립을 원했고 레반쥬엣의 양자인 응웬 반 코이(Nguyễn Văn Khôi, 혹은 Lê Văn Khôi)와 작당했다고 적었습니다.
응웬 반 코이는 강등되어 후에로 올라와 관련 설명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복종하기는 커녕 고(故) 레 반 주엣 총독의 주요 관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밤에 잡혀들어 갔었던 죄수들을 풀어주고 모두 응웬 반 코이를 따라서 총독인 응웬반꿰(Nguyễn Văn Quế)와 그를 고발한 보짠이었던 박 쑤안 응웬의 목을 치러 갑니다.
결국 사이공은 코이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그 다음날, 미토(Mỹ Tho)와 서부의 지방, 그리고 비엔화(Biên Hòa), 바리아(Bà Rĩa), 모쏘아이(Mö Xoài)에 반란군에게 항복을 한다는 선언문이 게시되면서 코친차이나의 남부는 모두 그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반란의 소식에 민망왕은 육지와 바다로 군대를 파병합니다.
이 두 군대는 거의 동시에 도착을 했는데 첫 번째 군대는 동차이(Đồng cháy)에 주둔하고, 다른 군대는 지옹 옹 또(Giồng Ông Tố)를 따라서 사이공강에 주둔했습니다.
강은 남요새(Fort du Sud)부터 반대편까지 쇠사슬로 막히게 됩니다.
6월과 7월에 공격이 시작되었고 코이의 군대는 성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민망왕의 군대는 사이공 강과 아발렌쉐 수로 (arroyo de l’Avalanche, 현재의 티예 Thị Nghè 수로)에 닻을 내리고 성의 앞에 진을 폈습니다.
그리고 포위한 군대는 주변에 요새를 주변에 건설했고, 이 요새의 높이는 성의 높이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이공의 함락은 응웬 반 코이가 시암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지연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띠엔(Hà Tiên)과 쩌우독(Châu Đốc)에 나타나서 캄보디아 왕을 빈롱(Vĩnh Long)까지 몰아냈습니다.
이들은 이후 철수를 하면서 푸르삿(Pursat)과 바땀방(Battambang)에서 전투를 하면서 귀국했습니다.
시암인들과 캄보디안들에 대한 관찰과 방어를 위해 안남 장군인 쭝 민 지앙(Trương Minh Giảng)은 프놈펜의 안마리(An Mari)라는 성을 짓도록 명령하고 1834년 이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암인들이 떠나고 나자 5개 지역은 민망의 장군들에게 재빨리 함락됩니다.
그러나 사이공은 1년동안 포위되었지만 아직 버티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공격은 1834.4월에 개시되어 8시간 동안 진행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공격자들은 패퇴했습니다.
그러나 성은 거듭된 공격 끝에 7월 6일 마침내 함락됩니다.
성이 합락되자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코이의 아들과 프랑스 파리 외국 선교협회의 선교사인 죠셉 마르찬(Joseph Marchand) 신부와 반란군 관리들은 모두 수레에 실려서 후에로 압송되어 천천히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총 1,137명의 남자들이 무덤의 평원 (Plaine des tombeaux)에서 죽음을 맞이해서 마비엔쭈(Mả Biền tru, 공포의 언덕) 혹은 마우이(Mả Ngụy, 반란군의 무덤)라고 불리는 곳에 같이 묻혀졌습니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민망왕은 너무 커서 방어에 너무 많은 군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아롱왕 치세때 올리비에가 지은 성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더 작은 성이 건축되고 이 성은 프랑스에 의해 1859년 파괴되었는데 현재 해군병영이 있는 곳에 서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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