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틀사이공/베트남 정보

베트남에 대해 생각하기 - 부정-1

by mmgoon 2007. 3. 12.

앞에 긍정적인 글을 하나 쓰고 났더니 다음의 기사를 발견했다. 출처는 (한겨례21)

이 문제는 뭐 간단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국제사회라는 것은 '단순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하는' 그런 논리로 진행되는 것이다.

뭐, 베트남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비록 이들이 공산주의를 내세운다고 해도.

암튼 읽어보시기를...




[특집] 베트남, 영원한 피해자인가

한국 국민들이 정직한 사죄를 하듯, 베트남도 이제는 ‘캄보디아 침공’을 말하라



사진/ 89년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베트남군. 베트남이 가진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욕망’은 침공의 주요한 단서가 됐다.(GAMMA)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26년의 세월, 해마다 되풀이되는 베트남전 종전 기념일은 여전히 베트남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눈길을 끌고 있다. 

평화의 상징 같은 의미라기보다는 올해는 뭔가 좀 새로운 사실이 나올려나 하는 바람으로.


그렇듯 아직도 베트남전쟁은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구경꾼도,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 여전히 그 전쟁의 실상은 어둠에 가려져 있다. 

진정한 사과와 속죄가 없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몇해 전부터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개입, 특히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사죄를 주장하는 올곧은 소리가 국내외적으로 증폭되고 있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둘러싼 마찰


그렇다면 베트남은 어떠한가. 

베트남 종전 기념일 때마다 단골메뉴가 되어왔던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베트남’을 한번 접어놓고, ‘전쟁의 가해자’로서 베트남을 들여다보는 건 어떠한가.

이건 가해자로서 미국이나 한국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호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모든 사실은 공개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피해자’ 베트남을 위한 진정한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사죄하는 일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없는 전쟁의 영속성을 생각해본다면, 함께 진실을 말할 때만 교만스런 이 역사의 순환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다는 뜻에서다.


1975년 4월30일을 베트남 종전 기념일로 기억하는 이들은 많아도, 1978년 12월25일을 베트남의 대캄보디아 침공일로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만나본 적이 없다. 

베트남은 물론 캄보디아에서조차도.


베트남전을 반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했던 베트남은 왜 이웃 공산주의 형제국 캄보디아를 침공했을까. 

공산주의 블록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의 배경은 아직도 두터운 장막에 가려져 있는 게 현실이다. 

그걸 캐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공산주의 노선문제와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스탈린 노선을 걸었던 베트남 공산당과 마오에 경도되었던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사이에는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공산 맹주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는 1960년대 말 상당한 수준의 국경긴장이 일고 있었다.


‘양다리 외교’로 베트남전쟁 동안 두 공산 맹주의 지원을 받았던 북베트남은 1972년 중국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배신자로 여기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적인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급격히 러시아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동시에 북베트남의 하노이 정권은 베트남 내의 중국계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 여겨 배척한다.


한편 1975년 캄보디아를 해방시킨 크메르루주의 폴포트는 극단적인 화폐·농지개혁을 단행하고 마오이즘을 차용해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국경선 문제를 내세워 인접 강대국 베트남을 빈번히 공격한다.


결국 대립적인 노선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던 두 공산 맹주의 ‘마찰’은 서로 다른 쪽을 택한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충돌’로 표면화한 셈인데, 

그렇다고 ‘대리전’이었다고 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드러난 게 없다. 

실제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배신감을 느꼈지만 러시아 역시 완전하게 믿지 못했다. 

유일하게 캄보디아 침공의 정당성을 받쳐줄 러시아에도 침공 사실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던 크메르루주의 베트남 공격 역시 중국의 사주였다고 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어쨌든 캄보디아의 대베트남 국경 공격이 현상적으로 베트남의 전면적인 무력침공에 빌미를 제공했다면,

 베트남이 지녔던 역사적인 ‘욕망’은 내재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기 전인 19세기 이전부터 중국을 모델로 삼아 인도차이나 전역을 아우르는 ‘대베트남’ 건설의 꿈을 키워왔다. 

이 역사적인 욕망은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공산당을 베트남 공산당의 하부기구로 인정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 베트남 중심의 연방제 통일국가건설을 명시하면서부터 현실로 다가왔다.




‘대베트남 건설’의 꿈



사진/ 미국의 폭격과 폭포트의 킬링필드에 치를 떨어야 했던 70년대 초 캄보디아의 황폐한 풍경. “폴포트 정권과 비교해 오히려 자유롭고 먹고 살기 편해졌다”는 인민들의 정서만으로 침공사실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SYGMA)





“타이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통일할 때 우리의 혁명은 완수된다.” 


이건 몇해 전 베트남 공산당의 최고위급 간부로부터 사견임을 전제로 들은 말인데, 실제로 많은 베트남 공산당 간부들이 아직도 이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하자면 1975년 라오스에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한 베트남에 다음 목적지로 캄보디아가 지목됐다는 것이다. 

더불어, 캄보디아를 점령한 베트남이 타이 국경까지 공격했다는 사실을 되돌아본다면 베트남의 역사적 욕망은 침공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베트남이 10년 동안 캄보디아를 지배하면서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40만∼60만명의 베트남인을 캄보디아로 이주시켜 

모든 분야에서 ‘베트남화’를 추진했던 사실은 캄보디아침공이 단순한 군사·정치적 충돌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10년간 캄보디아를 점령했던 베트남은 자신들이 거부했던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전형을 캄보디아사회에 심었다. 

베트남문화를 강요하면서 특히 베트남어와 베트남 교과목을 강제로 교육현장에 이식시켰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민들은 현지 주민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헹삼린과 훈센을 앞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했고, 베트남이 모든 분야를 직접 관장했다. 

특히 정치·군사·경제·외교분야는 각 장관들이 매일 아침 베트남 대사에게 직접 보고하며 일일목표를 할당받을 정도였고, 

고위급 관리들은 베트남 여성과 정략적인 혼인을 시켜 이 아내들이 정기적으로 베트남대사관에 남편의 거동을 보고케도 했다.


그럼에도 경제적 수탈에 따른 인민들의 직접적인 고통은 별로 보고된 바가 없다. 

다만 국제구호품이 베트남당국의 관할 아래 있었고 그 배급 과정에서 부정·부패는 만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폴포트 정권의 강박에 시달렸던 인민들이 오히려 자유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캄보디아의 ‘베트남화’를 추진했던 베트남 당국의 정교한 전략 탓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폴포트정권과 비교해서 오히려 “자유롭고 먹고 살기 편해졌다”는 인민들의 정서가 침공의 정당성 확보에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미리 간파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전면적인 식민경작과 조직적인 베트남화를 추진하면서도 일정한 ‘자유’와 ‘밥’을 제공한 게 베트남의 대캄보디아 침공에서 특징으로 드러난다.


“악소문만 나돌았지 실제로 베트남군의 공격을 당했다거나 신체적 손상을 입은 증언자는 거의 없었다.” 


이건 1980년대 초 30만명이 넘는 캄보디아 난민들이 베트남 침공을 피해 타이국경으로 몰려들던 현장을 최초로 취재했던 일본기자 나오키 마부치의 말이다. 


“전통적으로 반베트남 정서를 강하게 지녀온데다, 폴포트의 유혈통치를 경험한 사회 전체가 베트남군 침공이라는 말 자체에 즉각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베트남군의 만행이 실제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난민촌에서 청년기를 보냈던 전 캄보디아 공보장관 엥모리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인들의 적개심


그러나 베트남군이 캄보디아 인민들을 신체적으로 해코지했건 안 했건, 경제적으로 밥을 주었건 말았건 간에, 그런 사실만으로 캄보디아 침공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더구나 베트남군이 철수한 뒤 1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식민통치 당시의 인물들이 총리와 장관 자리를 꿰차고 있는 형국이니, 베트남 침공의 실태조차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다.


베트남군이 떠난 지 12년, 지금 캄보디아의 유곽에는 베트남 소녀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캄보디아의 상징인 앙코르와트의 입장권은 베트남회사로 고스란히 넘어가고 있다. 

시원하게 뚫린 베트남행 도로에는 베트남으로부터 넘어오는 노동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총리 경호대는 베트남 출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줍잖은 캄보디아말을 하는 이들은 모두 베트남인들이라는 말도 나돌고 있다. 

그리하여 만나는 캄보디아인마다 베트남에 대한 적개심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게, 베트남전 종전 26년을 맞는 2001년 4월의 캄보디아 풍경이다.


이제 베트남도 말해야 할 때가 왔다. 한국과 미국이 말하기를 바란다면.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