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시에 있는 거리들은 대부분 베트남 역사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따서 지어, 그들의 업적 등등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 중에 똔(Ton)으로 시작하는 거리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러니까 똔 탓 투엣 (Ton That Thuyet), 똔 탓 담 (Ton That Dam), 똔 탓 티엡 (Ton That Thiep) 거리들은 19세기에 왕실을 섬겼던 똔 가문 출신 사람들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똔 탓 투엣 (Ton That Thuyet)은 가문의 가장으로 최소 9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1839년에 후에 박옌(Bach Yen)강 근처 마을인 푸몽(Phu Mong)에서 태어났는데
투엣은 똔 가문에서 역사적인 중요도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웬(Nguyen)왕조의 네번째 황제인 뚜득(Tu Duc) 황제를 모시는 주요 관리였습니다.
이 분이 똔 탓 투엣
똔 탓 투엣의 강력한 군사정책 덕분에 황제는 내/외부의 반란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공으로 인해 그는 황실에 들어가자마자 빠른 승진을 합니다.
그는 공들을 세움과 동시에 9명의 아들들을 두는데, 이 중 똔 탓 담 (Ton That Dam)과 똔 탓 띠엡 (Ton That Tiep, 이 아저씨는 종종 거리 이름으로 만들어진 똔 탓 티엡과 햇갈립니다) 이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데 반대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업적을 기려 응웬 후에(Nguyen Hue)와 함니(Ham Nghi)거리를 연결하는 거리 이름으로 명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똔 가문이 함니 황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똔 탓 담과 똔 탓 띠엡의 이름을 딴 거리들은 그들의 지도자였던 함리 거리에 인접해 있습니다.
1885년에 똔 탓 투엣은 깐 붕(Can Vuong)이라는 대프랑스 항쟁을 주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이 결과 프랑스는 왕궁에 침입을 하게되고 함니 왕, 3명의 왕비 및 똔 일족은 이를 피해 숨게됩니다.
이 때 똔 가문의 형제였던 똔 탓 담과 (Ton That Dam) 똔 탓 띠엡(Ton That Tiep)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왕을 지키라는 명을 받습니다.
도망하던 무리들은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 광야에서 수년을 보냅니다.
그러나 1888년 함 니 왕은 이 전에 자기의 신하였던 쭝 꽝 옥(Truong Quang Ngoc)이라는 자의 배신을 당했고,
이 때문에 그가 숨어 있던 꽝빈(Quang Binh) 지방 뚜엔 화(Tuyen Hoa)로 프랑스군이 몰려와
왕이 자고 있던 이른 새벽에 프랑스 군이 왕을 잡습니다.
이 때 똔 탓 띠엡은 왕을 보고하다 17세에 목숨을 잃습니다.
똔 탓 담은 황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과 왕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깐붕 항쟁은 함니가 잡히고 나서 심하게 위축되어 똔 탓 투엣은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수 차례 공격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 프랑스군에 의해 괴멸됩니다.
결국 투엣은 중국의 집에 가택구금이 되고 점차 미쳐가게 됩니다.
현재 호치민에 똔 탓 투엣의 이름은 4군에 강가에 있는 거리 이름이 됩니다.
결국 마지막 왕조를 끝까지 지키고 반프랑스 운동을 펼쳤던 똔 가문은 호치민의 길 거리 이름으로 나뉘었네요.
우리나라도 뭐랄까 일제에 항거하시고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기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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