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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am I?

예전에 한국 살적에

by mmgoon 2016. 7. 14.




외국에 사는 것이 이런저런 이유로 지칠 때가 있다.

대부분 우울한 감정과 같이 오지만 뭐랄까 외국 살이 자체가 지쳤다는 확실한 증거는 


'예전에 한국 살 적에'


 라는 대사가 마음에서 떠오른다면 내 경우 지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일종의 자기 최면 및 보상 심리 및 방어기재의 작동 같이 뭐랄까 머리속에 계속 예전에 한국 살 때 장면들이 스틸 이미지 처럼 지나간다.


그러니까 봄비가 주척거리는 거리에서 프리지아를 쓸데없이 구입한다든지

창 밖으로 내리는 장마비를 바라보면서 만화가게에서 책을 쌓아두고 라면을 먹는다든지

종로 뒤쪽 경북집에서 모듬전과 막거리를 마신다든지

불광동 시장통을 지나면서 만두와 순대를 사먹는다든지

평촌역 앞 곱창집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직원들과 곱창을 굽는다는지

산본의 뭐랄까 멋대가리 없는 가을을 느끼면서 빵집에서 빵을 산다든지

10월의 마지막 밤에 노래방에 가서 10월의 마지막 밤을 부른다든지

윗 공기가 서늘하다 못해 추운 어머님 댁에서 머엉하고 티비를 본다든지

눈이 뽀득거리고 극도로 추운 거리를 지나서 성탄예배 본다고 교회로 간다든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더 이상 우리 회사는 평촌에 있지 않고, 이제 산본에서 다시 살 일은 없을 것이며, 어머님 집도 예전같지 않고, 친구들은 늙어가고 있고, 더 이상 만화가게라는 존재가 남아있지도 않을 것 같고, 불광시장도 불확실하고, 암튼 한국 들어가면 울산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교회도 옮겨야 할 것 같고, 덕분에 종로를 아무런 일도 없이 걸어다닐 기회는 거의 없기에 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위에 소위 '예전에 한국 살적에' 라는 화면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을 해보면 마치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더니 마을이 그리고 집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당신의 집인 것을 깨닳고는 펑펑 울었답니다'


하는 식의 어떤 우화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물론 이런 식의 결론은 우화일 뿐이란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난 십수년의 세월이 동시에 공격을 할 것도 같고. 

새로운 외국에 적응하듯이 한 동안은 살아갈 것이 확실하다.


뭐 이런 생각들까지 지나가는 오늘이다.


암튼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

도데체 뭘 해야 다시 맑고 밝은(?) 정신 상태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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