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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베트남 정보

아오자이(áo dài) 이야기

by mmgoon 2014. 9. 4.

베트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에 하나가 바로 아오자이(áo dài)입니다.

그래서 이 아오자이에 대해 한 번 찾아봤습니다.

 

 

아오자이도 우리의 한복처럼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저런 모양의 변화가 있었다고 하네요.

 

아오자이의 역사는 아오자이의 선조격인 아오 뚜 탄(áo tứ thân)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요 19세기경 대부분의 베트남 여성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이 옷은 4개의 좁은 천 (두개는 앞에 두개는 뒤에)들의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겉옷으로 , 

얇은 일종에 블라우스 위에 입어서 여성이 움직일 때 뭐랄까 엘레강스한 움직임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다고 하네요.

 

농민들은 단순하게 검은색이나 갈색으로 단순한 색이었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5겹이고 다양한 색의 고급 버젼인 아오 누 탄(áo ngũ than)을 입었다고 합니다.

 

 

아오 뚜 탄 (Áo tứ thân)

 

 

19세기 무렵이 되면서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 결과 2개의 좁은 천을 결합해서 현대의 아오자이와 비슷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1828년에 민망(Minh Mạng)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남쪽과 북쪽이 서로 달랐던 패션이 통합되게 됩니다.

 

 

민망황제 칙령이후 바지를 사용한 아오자이

 

 

 

1930년대에 깟뚜옹(Cát Tường)이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의복을 국가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고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훌륭하네요)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뚜옹은 기존의 아오자이를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고있는 프랑스식 서양 옷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합니다. (으음 발전이 꼭 서양화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역시나 웬만한 사람은 한계를 못넘는것이죠)

 

이 결과 2장의 긴 천이 땅까지 내려오게 되고, 옷을 입은 사람의 몸에 맛춰서 옷을 달라붙는 형태를 띄게됩니다. 

또한 목의 깃, 손목과 팔의 모양이 서양 영향을 받게 됩니다.

 

뚜옹씨는 이 옷을 Le Mur 라고 부르는데 "벽"이라는 뜻의 불어로 그의 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Le Mur 식 아오자이

 

 

 

수 년 후에 사이공 다카오(Da Kao)에 살던 융(Dũng)이라는 재단사가 아오자이의 새로운 디자인합니다. 

그는 서양 패션 기술인 라글란(raglan) 스타일의 소매를 만듭니다.

이 결과 요사이에 보는 아오자이와 유사한 형태의 소매가 탄생을 합니다.

 

서양 라글란 기술을 사용한 아오자이

 

 

 

비록 아오자이가 북쪽에서는 1958년까지 일상복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현대적이었던 남쪽에서는 이미 아오자이가 뒤쳐진 패션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용의 여인"이라고 불린 쩐 레 쑤안(Trần Lệ Xuân)이 등장하면서 보트(bateu)넥과 가지런한 상체 라인으로 만든 아오자이를 입으면서 다시 패션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 결과 바로 거의 모든 남부 여성들이 구식으로 치부했던 아오자이를 다시 입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아오자이를 입은 쩐 레 쑤안

 

 

이러한 보트 스타일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이 시기에 히피스타일이 사이공에 들어오면서 옷의 길이가 무릅까지 짧아지고, 다양한 색을 띈 아오자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무릅길이까지 짧아진 아오자이

 

 

 

베트남 통일 전쟁 이후 옷감이 비싸지자 여성들은 아오바바(áo bà ba) 즉, 아오자이의 간단형 버젼을 입기 시작합니다.

아오바바는 뒤쪽 깃은 엉덩이까지 오고, 앞쪽은 편리를 위해 단추가 있습니다.,

 

이 시기동안 아오자이는 특별한 행사나 의전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다네요.

 

특히나 남쪽에서 매우 유행했던 아오바바

 

 

그러다가 1980년대 베트남이 도이모이(đổi mới) 정책을 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벗어나자 아오자이는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고, 베트남의 심볼이 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입게되었답니다. 

 

으음 결국 경재의 발전이 아오자이를 살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