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러스 키의 1885년 사이공과 그 주변지역의 역사적 기억(Souvenirs historiques sur Saïgon et ses environs)
피뉴 드 비엔 주교(Monsignor Pigneau de Béhaine)의 장례
이 시기에 피뉴 드 비엔 주교의 장례식이 있었고 우리는 종교와 충성이 극적으로 나타난 이 예식에 참여해 봅시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아드란의 주교는 사이공에 쟈롱왕이 대성당 근처에 마련해준 숙소인 화약이 보관되어 있던 떤사궁(딘 떤 사 Dinh Tân Xá)에서 머물렀습니다. 당시 티에(Thị Nghè) 기독교신자들의 교회가 이 근처 계곡 끝쪽에 있었는데, 이 곳이 주교의 무덤이 현재 있는 떤쏜(Tân Sơn) 교구의 일부가 됩니다.
주교는 이 곳에 별장을 짓고 그의 조카와 같은 깐(Cảnh) 왕세자와 가끔 휴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깐 왕자는 뀌년(Qui Nhơn) 포위 공격에 파견되었고, 쟈롱왕의 부탁으로 주교는 왕자와 동행해서 멘토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33년간의 힘든 삶의 끝에 피뉴 주교는 급성 이질에 걸렸습니다.
최선의 봉사를 보여준 고위 성직자의 노고에 감사와 사랑을 쟈롱왕은 최고의 의료진을 파견하고 그를 살리기 위한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깐 왕자는 매일 자신의 멘토를 방문했고, 쟈롱왕도 뀌년 함락 전임에도 주교를 만나러 찾아왔습니다.
1799년 10월 9일 주교는 그를 보좌한 선교사인 레라부스(Monsieur Lelabousse)에 품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나이 58세였습니다.
쟈롱왕은 이 비보를 듯고 비단 수의와 함께 아름다운 관을 보냈습니다.
10월 10일 그의 사체는 왕의 배에 실려서 사이공으로 돌아와 이 곳에 묻혔습니다.
10월 16일 사이공에 도착을 하자 그의 유해는 주교궁에 안치되어 2달단 공개되었습니다.
깐 왕자는 그의 스승의 유해와 동행하였고, 그를 스스로 제자이자 장남으로 생각하며 애도를 했습니다.
그는 주교 집 반대편에 임시 숙소를 짓고 그 곳에 밤낮으로 머물면서 왕국의 여러 곳에서 찾아온 관리들을 접견하면서 고인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쟈롱왕이 마침내 뀌년에서 돌아와 고인에게 감사하기 위해 직접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은 1799년 12월 16일에 사이공에서 약 5km 떨어진 떤손(Tân Sơn)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깐 왕자가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이 장례식 진행을 책임졌습니다.
정교하게 배열된 등불들로 만들어진 큰 십자가가 행렬의 선두에 섰고 일련의 정교하게 조각된 붉고 금색의 제단이 뒤를 따랐는데, 장식된 단은 각각 4명이 운반하였습니다.
첫 번 째는 금으로 쓰여진 4글자 후앙 띠안 추 자이 (Huáng tiān zhǔ zǎi, 천황주재)가 있었고, 두번째에는 성 베드로의 그림이, 세번째에는 성 바오로의 그림이, 네번째에는 수호천사의 그림이 다섯번 째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15피트 (4.6m) 길이의 장미목으로 만들어진 큰 등잔대에 프랑스와 코친차이나의 왕이 아드란 주교에게 수여된 칭호가 금색의 글씨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뒤로 성령의 휘장, 그의 십자가, 그의 주교관 등이 영구차 바로 앞에 위치했고, 영구차 양 옆으로는 코친차이나 곳곳에서 온 젊은 기독교인들과 사제들이 따랐습니다.
주교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는 약 20피트(6m)의 마차로 선발된 80명이 끌고 수가 놓아진 금색의 뚜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커다란 장미목과 25개의 큰 촛대로 장식한 관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12,000명으로 구성된 왕의 근위대는 2열로 도열하여 각 열에는 대포를 위치시켰습니다.
또한 120마리의 전투용 코끼리가 양쪽에 조련사들과 함께 도열했습니다.
북과 나팔수들이 안남과 캄보디아의 군악을 연주하였고 수많은 횃불들과 2000개가 넘는 등불이 뒤를 따랐습니다.
적어도 4만명의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쟈롱왕은 그의 어머니, 자매, 왕비, 자식, 궁정의 모든 여인, 각 부서의 공무원들을 대동하고 참석하였습니다.
이들은 주교를 위해 준비된 무덤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슬픔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무덤에 도달하자 리오(Liot) 신부가 천주교식의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식 장례가 끝나자 자롱왕은 무덤 앞으로 나아가 그가 직접 만든 애가를 읊었습니다.
이 애가는 비단에 수놓아져 사후헌시로 바쳐졌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성직자들과 기독교인들이 물러난 후 왕은 관료들과 함께 고인의 영혼을 위해 전통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후 왕, 깐 왕자 및 장관들은 각자의 추도사를 바쳤습니다.
왕은 주교의 업적을 기려 50명의 묘지기를 두어서 묘지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이 무덤 (안남사람들은 차까Cha Cả 라고 했다)은 이후 카톨릭과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에서도 쟈롱왕에 대한 기억과 고인에 대한 경의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이 나라를 차지하고 나서는 주교를 극동의 지역에 가장 충실한 프랑스인으로 칭송하고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였습니다.
1814년 자롱왕은 그의 거처를 후에로 정하고 통킹만에서 코친차이나까지 모든 안남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유명한 티나이 (Thị Nại, 현재의 빈딘 Bình Định) 항구의 정복자인 환관 레 반 쥬엣(Lê Văn Duyệt)이 코친차이나 남부의 총독이 됩니다.
그는 사이공에 거주하였습니다.
그의 공관은 황궁(호앙 꿍, Hoàng Cung) 뒤쪽이었는데 오늘날의 노르돔 대로(Norodom boulevard, 현재의 레쥬안 Lê Duẩn 거리)로 주교궁이 있는 곳과 거의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의 부인의 거처는 성벽 바깥쪽 정부 궁전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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