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러스 키의 1885년 사이공과 그 주변지역의 역사적 기억
(Souvenirs historiques sur Saïgon et ses environs)

1885년 베트남의 역사 학자인 페트러스 쭝 빈 키(Petrus Trương Vĩnh Ký)는 통역사 대학(Collège des Interprètes)에서 사이공과 그 주변 지역의 역사적 기억(Souvenirs historiques sur Saïgon et ses environs)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합니다.
같은 해 이 강의는 소책자로 발행이 되는데, 그의 강의가 담긴 이 서적은 식민시절 및 그 이전 시절 사이공과 쪼런 지역 역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페트러스 키의 강의는 예전 베트남 살적에 인터넷에서 갈무리 했었던 자료입니다.
덕분에 출처가 기억나지 않고 (그 홈페이지들도 없어졌죠), 그림들의 해상도가 낮군요.
프랑스어와 베트남의 예전 지명 등으로 인해서 구글 번역기의 도움으로 겨우 번역을 해봤습니다.
잘못 번역된 내용은 알려주세요 (굽신굽신)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당시 베트남의 모습을 떠올려 보시는데 사용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글에서 ‘지금’은 1883년 당시를 말합니다. 현대는 요사이를 말하는 것이고요.
자 시작합니다. 페트러스 키가 강의를 시작한 19세기 사이공으로 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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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사이공시는 안남인(베트남인)들의 노란 국기가 프랑스의 국기로 바뀐 이후부터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변화는 1859년에 시작되어 현재 코친차이나 남부의 수도가 되기까지 지속적으로 전행되어 왔습니다.
오늘 나는 오래되고 또한 현대의 사이공의 두 모습을 되집어 보려고 합니다.
사반세기라는 짧은 시간동안 이 도시의 근대화는 2개의 시기로 나뉠만큼 크게 변화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급작한 변화의 시기에 이전의 기억을 보전하여 현재에 이들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자 합니다.
역사적인 흔적들은 서로 연결되어 국가의 시기를 정하고 종종 망각된 것들을 상기시킵니다.
사실적인 기억들은 세대가 흐르면서 약해집니다.
이런 연속적인 변화들은 삶과 사람들에게 있어 필요한 것들이지만 이들에 대한 기억은 만약 역사가 당시 기록을 통해 보존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바뀌어 버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관심하다고 여기는 이 사이공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건들이나 아직 역사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우리 후손들의 많은 관심을 끌만한 여러 사실들을 목격했습니다.
따라서 오래된 사이공을 산책하면서 이들의 모든 부분들을 방문하고, 우리의 관찰이 지리적, 역사적이 되도록 해봅시다.
그래, 지나간 시간 동안 사이공은 어땠습니까?
쟈롱(Gia Long) 이전과 그 시절에는요?
민망(Minh Mạng), 티우찌(Thiệu Trị)와 투득(Tự Đức) 시절은요?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 모습은 어땠습니까?
사이공 (Saigon)이라는 이름
사이공의 이전 이야기를 설명하기 전에, 우리 도시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찾아봅시다.
쟈딘통치(Gia Định thông chí)의 작가에 의하면 사이(Sài)라는 말은 중국의 ‘목재’를 뜻하는 한자에서, 공(Gòn)은 목화의 안남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즉, 이 이름은 캄보디아인들이 예전에 토지를 개간해서 목화를 심은 것에서 비롯되며 이 개간의 흔적은 까이 마이 (Cây May 탑과 주변지역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캄보디아인이 만든 이름을 우리가 사용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저는 아직도 이것이 진정한 기원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사이공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사람들도 불렀습니다.
이 이름들은 예전 유럽에서 만든 지도에서 이 이름을 발견되는데, 사이공은 이 도시뿐 아니라 자딘 지역 전체를 묘사하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쟈롱 (Gia Long) 이전의 사이공
쟈롱 이전의 사이공은 캄보디아의 보통 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680년 이 곳은 캄보디아의 두번째 왕의 거처가 됩니다.
이후 역사에 의하면 이 곳은 1658년 남부를 다스리던 응웬 푹 떤(Nguyễn Phúc Tần)이 후에(Huế, 당시 베트남 수도)의 명을 받아 안남인(베트남 사람들)들을 이동시켰습니다.
안남족은 참파(Chiêm Thành 찌엠탄)의 옛 주민들을 몰아내고 영토를 정복한 후, 캄보디아인(크메르족)과 이웃하게 되었는데, 캄보디아인들은 천상의 왕의 자손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안남족의 성공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후에 왕조의 허락과 지원을 통해 베트남인들의 정착지는 곧 훨씬 더 커졌습니다.
1680년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인 만주족의 청을 피해서 명나라 군대의 두 지휘관들이 60척의 배를 몰고 3000명의 군인들과 함께 뚜란(Tourane, 지금의 다낭)으로 와서 정착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후에 왕궁으로 사자를 보내 그들의 정착을 요청했습니다.
안남의 왕은 이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캄보디아 왕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서 이들이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에 정착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동나이(Đồng Nai)에 이르러 2개 그룹으로 나뉘어 하나는 비엔 호아(Biên Hòa)에 정착했고 나머지는 미토(Mỹ Tho)로 향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의 두 왕은 고빅(Gô-bich)과 사이공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이공에 살던 왕은 비엔호와와 미토에 정착한 중국인들에게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후에의 왕에게 편지를 보내 그에 대한 보호조치 약속을 재확인했습니다.
후에의 베트남 왕은 스스로를 이 상황의 중재라고 삼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반(Văn) 장군을 보내서 중국인들과 메콩강에 강력한 철선을 쳐서 안남인들과 교역을 막으면서 튼튼한 요새에 있는 고빅의 캄보디아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미토에서 중국을 격파한 후 이 장군은 고빅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첫번째 왕인 네악-옹-투(Néâch-ông-thu)는 우동(Oudong)으로 낙향했고 마침내 캄보디아를 떠나 벤예(Bến Nghé, 즉 사이공)으로 돌아온 안남의 장군과 조약을 맺였습니다.
일년 후 (1884) 네악-옹-투는 조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후에의 왕인 응웬 푹 떤(Nguyễn Phúc Tần)은 응웬 후 하오(Nguyễn Hữu Hào)를 보내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전쟁 중 캄보디아의 왕은 포로로 잡혀서 사이공에 도착한 후 병에 걸렸고, 사이공에 살던 두 번째 왕은 자살을 했습니다.
이 후 그의 아들이 네악-옹-옘(Néâch-ông-yêm)이 안남인들에 의해 고빅의 왕좌에 앉습니다.
이런 식의 후에 왕궁의 당시 캄보디아였던 남부에 대한 개입은 정부 장려에 따른 안남인들의 이주를 부추겼고 점진적으로 그 나라를 안남인들 즉 베트남인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결과 1698년 응웬 푸 추(Nguyễn Phúc Chu)는 다른 안남국과 유사하게 현, 준현, 마을, 부락 등을 만들어서 행정구역을 정리했습니다.
처음 비엔호아와 쟈딘이 부(푸 phủ)로 만들어지고 다시 2개의 현(후옌 huyện)으로 나뉩니다.
이 때부터 응오이 하이 후엔 (người hai huyện) 즉 2개 현의 사람들이라는 명칭이 비엔호와 와 쟈딘의 거주민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1772년 떠이선 (Tây Sơn), 응웬 냑 (Nguyễn Nhạc), 응웬 루 (Nguyễn Lữ) 및 응웬 후에(Nguyễn Huệ) 등이 후에 왕실에 반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찐삼(Trịnh Sâm)은 수도인 후에시를 공격했죠.
이에 응웬 푹 투안(Nguyễn Phúc Thuần)과 그의 조카들인 응웬 푹 동(Nguyễn Phúc Đồng)과 응웬 푹 안(Nguyễn Phúc Ánh, 이후 쟈롱 Gia Long 왕)은 1774년 쟈딘(Gia Định), 동나이 (Đồng Nai), 사이공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15년 동안 쟈롱(Gia Long)은 떠이선 반군에게 쫓기며 추격당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사이공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 머무는 시간은 거의 없었고, 뀌년(Qui Nhơn) 출신 적들의 끊임없이 공세에 쫒겨다녀야 했습니다.
쟈롱 통치 시기의 사이공
1789년 쟈롱이 사이공을 떠이선의 정복에서 되찾은 다음 최초의 성을 지었고, 나는 이 성의 위치와 흔적을 현대 사이공의 지형과 연관지어 찾아보았습니다.
1788년 코친차이나 선교회 아드난의 주교인 Monsignor Pigneau de Béhaine이 쟈롱의 아들인 깐(Cảnh) 왕자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프랑스 장교들과 함께 사이공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쟈롱은 이미 사이공을 되찾았고, 그 곳에 왕권을 세웠습니다.
다음 해에 쟈롱은 공병장교인 올리비에의 감독하에 사이공의 이전 성체를 건설합니다.
성체는 쟈롱왕이 주장한 대로 팔괘(밧콰이, Bát quái)의 형태인 팔각형이고 8개의 문이 있었고, 4방으로 4분되어 있었습니다.
성에는 비엔화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어진 해자와 다리가 있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15 안남 큐빅 (5.20m) 였습니다.
깃대가 서있는 중앙은 현재 대성당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성 위에서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성은 현재의 막-마혼 거리 (rue Mac-Mahon, 현재의 남키코이냐Nam Kỳ Khởi Nghĩa거리)를 따라 남북으로 나중(1837)에 건설되고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성의 위치까지 연장되었고, 동서로는 에스파냐 거리 (rue d’Espagne, 현재의 레탄똔 Lê Thánh Tôn거리)에서 모아 거리 (rue des Moïs, 현재의 응웬딘찌우 Nguyễn Đình Chiểu 거리)까지 연장되었습니다.
동쪽에는 2개의 정문(꾸아띠엔, cửa tiền)이 있었는데, 이 중 하나는 쟈딘문(Gia Định Môn)으로 광장과Canal du marché de Saigon (응웬 후에 Nguyễn Huệ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피엔안문(Phiên An Môn)으로 현재의canal de Kinh Cây Cám을 따라 있는 해군 포대 근처에 있었습니다.
서쪽의 뒤쪽벽에도 봉 투엣 문(Vọng Thuyết Môn)과 꿍 탄 문(Củng Thần Môn) 2개의 문이 있었는데, 아발랑쉐 수로의 (arroyo de l’Avalanche) 2번째와 3번째 다리 (현재에는 티에 Thị Nghè 수로의 봉 Bông 다리와 키우 Kiệu 다리) 방향이었습니다.
성의 왼쪽은 북쪽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2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호아이 라이 문(Hoài Lai Môn)과 푹 비엔 문(Phục Viễn Môn)이었는데 아발랑쉐 수로의 첫번째 다리 (현재의 티에 Thị Nghè 다리)를 내려다보는 위치였습니다.
성의 오른쪽에는 띤 비엔 문(Tĩnh Biên Môn)과 뚜엔 화 문(Tuyên Hóa Môn)이 있었는데 막-마혼 거리 (rue Mac-Mahon, 현재의 남키코이냐 Nam Kỳ Khởi Nghĩa 거리)에 있었습니다.
한 문은 전략 거리 (Stratégique, 현재의 디엔 비엔 푸 Điện Biên Phủ 거리) 쪽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쩌론 대로 (Haute de Chợ Lớn, 현재의 응웬 티 민 카이 Nguyễn Thị Minh Khai 거리와 쩐푸 Trần Phú 거리)쪽에 있었습니다.
쟈딘 성은 지아롱이 22년간 사용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그는 매년 우기에 떠이선 반군에 대한 원정을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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