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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사이공/호치민 이야기

호치민 거리 이름에 얽힌 이야기들

by mmgoon 2018. 1. 17.

외장하드를 간만에 뒤지다가 보니 이런저런 글들이 있네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호치민 길거리 이름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호치민시의 도로명은 유명한 베트남 인물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을 따라 명명됩니다.

도로 이름과 여기에 관련된 역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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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꺼(Au Co)

베트남 민족의 어머니 



호치민 시의 떤빈(Tân Bình) 군은 한국 교민들에게 익숙한 군(Quan)으로 호치민에 도착하는 1차 관문인 호치민 떤선녓 공항이 있고, 

1세대 교민타운이었던 "꽁화(Cong hoa)"지역이 있고 (지금은 7군으로 많이 옮겼죠), 지금도 많은 한인 식당과 이발소 등등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떤빈군과 서쪽의 떤푸(Tan Phu)군 및 11군과 경계선을 만드는 큰 도로가 어우 꺼(Au Co)길입니다.


어우꺼 대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건국 신화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래 전에 신농씨의 자손으로 운남성에 바다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던 킨 즈엉 브엉(Kinh Duong Vuong)이 용왕의 딸 용녀와 결혼하여 락롱꿘(Lac Long Quan)을 낳고, 

락롱꿘은 그 지역의 괴물들을 퇴치하고,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 등을 가르쳤으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면서 살고 있었죠.


오늘의 주인공인 어우꺼(Au Co)는 북방으로 부터 고대 베트남 지역으로 침입해 오던 라이(Lai) 황제의 딸이었는데, 아버지를 떠나 락롱꿘과 결혼하여 100개의 알을 낳아 100명의 아이들을 얻게 됩니다.


후에 성격차이로 인해 둘은 이혼을 하게 되고, (아아 이혼이 벌써부터)

부부는 각각 50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어우꺼는 산으로, 락롱꿘은 해안 지역으로 가게 된다는 건국신화죠.


자자, 갈라서자고


산으로 간 어우 꺼의 자손들은 형제 중에 가장 힘이센 자를 왕으로 뽑아 훙브엉(Hung vuong)을 삼고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 국을 세우게 됩니다.

그 지역이 지금의 베트남 북부 푸토(Phu Tho)성이라, 지금도 푸토성에 가면 훙브엉의 사당을 볼 수 있답니다.

 

 



응웬 티 민 카이 (Nguyen Thi Minh Khai)

베트남 공산당의 독립투사 



호치민 1군과 3군의 경계선이 되는 Nguyen Thi Minh Khai 대로는 우리집이 있는 곳이죠. 

이 길은 500번지가 넘는 긴 길입니다.


응원 티 민 카이(Nguyen Thi Minh Khai )는 베트남 독립 투사입니다.

독립운동 중에 1940년 남끼 커이 냐 봉기(뒤쪽에 소개되는 길이름이기도 합니다) 의 배후 지도 세력으로 지목되어 프랑스 식민정부로 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1941년 호치민시 혹몬(Hoc Mon)에 있는 사형장에서 31살의 나이에 총살형을 당합니다.



그녀는 홍콩에서 호치민 주석의 비서 생황, 모스크바에 베트남 공산당 대표로 참석 하는 등 나이는 어렸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습니다.

남편인 레 홍 퐁(Le Hong Phong) 역시 유명한 독립투사고, 친동생은 얼마전 타계한 보 응웬 잡(Vo Nguyen Giap) 장군의 첫번째 부인입니다.

 



 

남끼 커이 냐 (Nam Ky Khoi Nghia)  

식민지배에 항거한 베트남 남부 민중 봉기



떤선녓 공항에서 호치민시내로 들어올 때 지나는 길입니다.

이 길도 400번지까지 있는 아주 긴 길입니다. 통일궁 앞을 지나는 길이죠.


이 길의 이름은 1940년 프랑스 식민 정부와, 일본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하여 동양 공산당(베트남 공산당의 전신) 간부들의 주도하에 남쪽 전역에서 발생한 최대규모의 민중 무장 봉기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남끼(Nam Ky) 는 '남쪽 사람', 커이 냐(Khoi Nghia)는 '봉기'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사람 이름이 아닌 역사적 사건을 따라 이름이 붙여진 곳입니다.



당시 지도부였던 보 반 떤 (Vo Van Tan), 판 당 루(Phan Dang Luu), 응웬 티 민 카이(Nguyen thi Minh Khai), 하 후이 떱(Ha Huy Tap), 응웬 반 끄(Nguyen Van Cu) 들도 호치민시의 거리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디엔 비엔 푸 (Dien Bien Phu)

베트남의 전설과 같은 장군을 기린 거리



보 응웬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은 프랑스, 미국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베트남 국민의 전쟁 영웅입니다.

그러니까 베트남군을 이끌고 프랑스와 미국을 1, 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물리치고, 이어 두번이나 침략한 중공군을 물리친 전설과 같은 분입니다.


베트남 20세기 역사에서 베트남 국민들에게 정치인 호치민이 있었다면 군인으로서는 지압 장군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54년 베트남 서북부 디엔 비엔 푸 성에서 있었던 프랑스와의 전투에서의 승리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떠나는 분기점이 되었기에 

영웅 지압 장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마음은 각별하다고 합니다.


지압 장군의 업적을 요약하면


(1)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로 프랑스 해방 전쟁(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종지부 (적군 : 프랑스)

(2) 1975년 사이공(호치민) 대통령궁 점령으로 베트남 통일 전쟁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승리 (적군 : 미국)

(3) 1979년 10만 예비군으로 20만 중국군 격퇴 (적군 : 중국)



지압 장군은 102세의 나이로 2013.10.4일 돌아가셨죠. 

모택동, 체 게 바라와 함께 세계 3대 게리라 전략가로 평가됩니다.


장군의 혁혁한 공을 기리기 위해 호치민에는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거리가 있습니다.

이 거리는 호치민에서 빈탄군, 1군, 3군에 걸쳐 있는 큰 도로의 하나이고, 하노이에도 바딘군(호치민 묘역  부근)에서 호아끼엠 군을 잇는 큰 길입니다.

 

 



하이 바 쭝 (Hai Ba Trung)

중국 맞선 베트남 역사 최초의 봉기



베트남 큰 도시들에는 왠만하면 하이 바 쭝(Hai Ba Trung)이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이 바 쭝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2명의 쯩 할머니' 가 되는데, 40~43년 사이 중국 한나라 군대에 맞서 봉기의 지도자였던 쯩짝, 쯩니 두 자매를 일컫는 말입니다.


쭝 자매의 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외국 식민세력에 맞선 최초의 봉기라는 데 큰 의미가 있어서 쯩 자매의 공적은 오늘날 베트남에서도 계속하여 기억되고 있습니다.

 

코끼리를 타고 한나라 장수를 쫓아내는 하이바쯩 자매. 고깔모자 쓴 사람들은 베트남 군, 민만항 표정 짓는 사람은 한나라 장군


 



 

똔 득 탕 (Ton Duc Thang)

호치민 주석의 뒤를 이은 정치인



똔득탕은 1군에서 사이공강을 끼고 있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의 사이공 강변에는 요사이는 문을 닫은 박당 항구가 있고, 마제스티 호텔, 르네상스 호텔, 롯데 레전드 호텔 등이 있습니다.


이 길의 이름은 호치민 주석의 청년시절부터의 동료이자, 1969년 그의 사후에 주석(대통령) 자리를 물려받고, 

1976년 7월 베트남 전쟁이후 통일 베트남의 초대 주석이 되기도 한 똔득탕 주석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참고로 호치민시 7군에는 똔득탕 대학교도 있습니다.

 


 




응웬 반 린 (Nguyen Van Linh)

베트남의 경제개혁개방 도이머이를 이끈 정치인

 


요사이 호치민시에서 가장 많이 한국 교민들이 살고있는 곳인 신도시 푸미흥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응웬 반 린(Nguyen Van Linh) 거리가 있습니다.

예전에 늪지대였다가 베트남 스타일 강남 개발로 이제는 부자동네로 거듭난 푸미흥에 있는 이 길은 1986-1991년 기간동안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을 하면서 

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 머이 (Doi Moi)를 이끈 정치인인 응웬 반 린의 이름을 딴 거리입니다.



 

 

쩐 흥 다오 (Tran Hung Dao)

몽골군을 2번이나 격퇴한 장군



쩐 흥 다오는 베트남 쩐(Tran)왕조 초기의 장군으로,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 영국의 넬슨 제독에 해당되는 분이죠.

1257년 침략한 몽고군을 격퇴시키고, 1282~88년에는 강화를 주장하는 왕과 대신들의 의견을 꺽고,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이 보낸 군대와 두번째 전투도 승리해서 몽고군을 물리칩니다.

덕분에 몽고가 점령하지 못한 나라에 베트남이 포함됩니다.


베트남에 놀러와서 사이공강가쪽으로 가면 로터리 한 가운데 장군의 동상이 하나 서있는데 이 분이 쩐 흥 다오 장군입니다.


바로 이 분!!



이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가 바로 쩐 흥 다오 거리랍니다.

호치민 1군과 5군에 걸쳐있는 쩐흥다오 거리에는 호치민 최대 나이트 고쉽(Gosip) 등등이 (응?) 있습니다.





함 니 (Ham Nghi)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 시기에 독립 운동을 한 왕



함 니는 응웬(Nguyen) 왕조의 8번째 왕으로 식민지의 식물 국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전국의 지식인들에게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으로 부터 독립운동을 촉구한 죄(?)로 

프랑스에 의해 왕권을 박탈당하고, 알제리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1843년). 




실제로는 14세에 왕이 되어 1년 남짓한(1884~1885) 기간동안 제위를 하고, 1888년 알제리로 망명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였고, 재위 기간도 짧았고, 그의 독립운동이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왕으로서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었기에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호치민 1군의 큰 길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레 러이 (Lê Lợi)

레 왕조의 시조

 


레 러이는 1400년대 초 명나라에 맞선 람선(Lam son) 봉기를 주도하여 명의 세력을 축출하고, 베트남 역사상 가장 긴 왕조인 레(Le)왕조를 세운 왕입니다.

그러니까 명나라 영락제가 베트남을 침공해서 안남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지화를 하자 1418년 의병을 조직해서 궐기를 선언하고 전국적으로 독립전쟁을 일으킵니다.

명군을 격파하고 1427년 왕으로 추대되서 레 왕조를 만든 분이죠.


이후에 레 왕조를 무너트리고 세워졌던 응웬(Nguyen)왕조가 프랑스에게 식민지가 된 까닭에 베트남 사람들은 레 러이왕과 레 왕조를 좋하하는듯 합니다.



이 레 러이왕의 이름을 딴 레 러이 거리는 호치민시 1군의 중심인 오페라 하우스에서 (실제 이름은 시민극장) 벤탄 시장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참고로 요사이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라서 교통지옥이죠.




레탄똥(Lê Thánh Tông)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레 탄 똥 왕은 참파(Champa)왕국과 란상(Lan Xang, 오늘날의 라오스)왕국을 복속시켜 영토확장을 이뤘으며, 체제를 정비해 베트남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레 탄 똥 왕의 이름을 딴 레 탄 똥 거리는 호치민시 1군의 주요 거리로, 하이바쭝 거리와 만나는 부분은 소위 일본 거리로 알려진 곳이죠.

일본 식당, 술집, 마사지, 수퍼마켓이 몰려있습니다.




뭐 이 정도인가요.

가볍게 한 번 읽어보세요.